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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뭐가 모자라는가(6-1)

한국인은 일본인들의 착취에서 해방되자 그 즉시 전후 페허우에서 자기의 경제건설을 시작했다. 1967년 한국인이 논밭에다 자기네의 자동차 공업을 일켜 세우겠다는 말을 들은 미국 통용자동차 공사의 번처가 현대집단을 통해서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현대집단이 확실이 이런 구상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현대집단이 정말 자동차를 제조해낸다면 나는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20년이 지난 지금 번처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하다. 현대집단은 세계 자동차업계의 거두로 부상했다.

짧디 짧은 몇 십년간 수천년간 내려오며 빈궁과 취약함이 쌓이고 쌓여 남들의 눈에 그 이미지를 확립하지 못한 한국도 국민수입이 92달러였던 과거가 있다. 그것은 지난 력사로 되였다. 한국은 이미 번데기가 나비로 변했다. 한국은 가는 곳마다 고층대궐이 즐비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늘을 떠받들고 있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승용차들의 물결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금속의 색채와 네온등으로 장식한 찬란함은 세계에 자기의 존재를 강렬하게 위시하고 있다.



지금 중국은 현대화의 길을 따라 활개쳐 전진하고 있다. 현대화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인가! 현대화란 일차적으로 진화한다는것이나 다름없다.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그런 일차성 진화이다. 그런데 우리 신변의 현대화를 보면 북경의 전통 가옥의 자취가 없어지게 되고 강소와 절강일대 흰벽과 검은 기와가 즐비한 작은 읍이 사라지는것이며 복건의 흙층집, 운남의 다락집이 사라지는것으로 되여 있다. 이를 대체한것은 도시의 유리막 빌딩이다. 이는 식탁의 좁쌀죽과 차가 메탕로와 헴버거와 코카콜라로 바뀌여진다는 뜻이다.

"중국"이란 지정학적의의와 인문학적의의의 종합적인 적재물을 생각할때 우리는 언제나 미혹스럽기만 하다. 이 민족은 정말로 리해하기 힘든 민족이다. 얼마 멀지 않은 과거에 중국은 고집불통 로인처럼 자기의 생활방식을 완고하게 지켜왔다. 지어는 망국망종의 관두에서도 추호의 개변을 불허했다. 망국망종이 될지언정 문화를 망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문화지상주의정신이라고 할수 있을가? 그런데 겨우 몇십년후에 중국은 또 세계에서 본토 문화유산을 가장 홀시하는 나라의 하나로 전락되였다. 문화독특성이란 중국의 락후와 홀로서기의 표지로 인식한것이다.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문화의 표지를 지우려고 하고 있다. 금방 도시에 들어온 시골아낙네처럼 하루 빨리 자기가 입던 시골티나는, 낡은 천으로 짠 옷을 바꿔 입으려고 하는것이나 다름이 없다.

모든 방면에서 우리는 언제나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합작하는 립장으로 이 세계를 바싹 따라 자기의 모든 특점을 아낌없이 방기하고 있다. 중국의 대도시에서 가장 활발한 명절은 성탄절이다. 비록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성탄이란 무슨 영문인지 모르면서도 말이다. 력사적의의와 문화적의의를 띠고 있던 수많은 건축이 아무런 반항도 없이 폐기되였고 훼멸되였다. 세계 각국에서 가장 풍부한 고대전적문물이 중국의 도서관에서 먼지에 묻혀 잠자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고대유물이 이제는 무대우에 당당하게 올라가지 못한다고 여긴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은 수천년 력사의 풍랑을 헤쳐온 민족이 응당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니다. 다행이라면 최근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문화가 점차 보호를 받고 있으며 발양, 제창되고 있다는 이점이다.

현대화한 한국에서는 가는 곳마다 력사가 존중을 받고 있으며 중시를 받고 있다는것을 발견할수 있다. 빌딩, 대형기업, 고속도로 곁에서도 볼수 있는바 지난날의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것이다. 건축물뿐만 아니라 생활방식도 보존하고 있다. 지어는 력사상 한문화권의 일부 독특한 문화생태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모든것은 지금 한국의 가는 곳마다 생생하게 생존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 한국의 이와같은 상황을 보고 경악감을 금치 못했다.

중국의 학자 팽림의 방한필기에는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몇몇 학자의 댁에서 본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팽림선생이 방문한 사람은 하유읍이란 학자였다. 이 학자는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고대례절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기거나 교우와 종교신앙 등 다 고대례의에 따랐다. 모친이 별세했을때 그는 고대례의에 따라 3년간 효를 지켰다. 팽림이 하씨의 집에 갔을때는 마침 추석이였다. 추석과 단오, 구정(설명절)은 한국의 3대 명절이다. 한국인들은 상기 세 명절을 아주 중시했다. 추석은 한국인들에 성묘하는 명절이다. 제를 지내기 전날 하선생은 깨끗이 목욕하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제를 지낸다. 제를 지낼때 산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것과 똑 같게 술을 권했다. 그의 장자는 순서에 따라 조상들에게 술을 붓고 밥을 차려놓았다. 이 시간은 그가 생전에 식사하던 시간과 맞게 정했다. 이 례를 지내는것이 근 한시간이 걸렸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이른바 제를 지내는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는것과 같으며 신에 제를 지내는것은 신이 살아있는것이나 같다는 례의이다.

하유읍선생은 저명한 례의전문가이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한국의 일부 서원에서 전통적인 정제를 지낸다. 그때면 꼭 그를 모셔간다. 그날 그는 유관을 쓰고 검은 제복을 입고 침착하게 제를 지휘한다. 한국학생들은 그의 지휘를 아주 존중한다. 그들은 공자와 맹자에 례를 올린다.

한국에는 아직도 완전히 전통방식에 따라 교학하는 서원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의 "태동고전연구소"가 그 좋은 본보기이다. 이 학교의 과정은 4서5경을 위주로 한다. 학생은 꼭 고대의 선비처럼 첫 1년에는 "4서"를 외워야 한다. "4서"중에 맹자가 가장 길다. 때문에 두번에 나누어 외우게 한다. 한번에 4시간이 걸린다. 다른것은 다 한번에 외운다. 여기서 독서하는것도 고대 그대로이다. 외울때면 가락에 맞춰 절주에 따라 읽는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외워야 학생들이 고전을 착실하게 장악할수 있다고 한다.

여기의 학생은 대학 본과이상 학력이 있어야 입학신청자격을 가진다. 모든 전업이 다 있다.신승용이라는 학생은 서울대학 경제학부의 학생이다. 그에게 무엇때문에 고전을 배우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는 "경제형세라는것은 순식간에 천변만화하는것이다. 즉 아주 복잡하다는 뜻이다. 고전전적은 아주 깊은 철리를 내포하고 있기때문에 나의 관찰력을 높여줄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정부에서 제창해서 진행되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회현상이다.

서방 강세문화는 현대사회에서 의심할바 없이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서방문화는 강성태세로 지구를 휩쓸고 있다. 물질주의세계관은 그 부산물인 허무주의와 함께 부동한 살색을 가진 사람들의 두뇌를 세뇌하고 있다. 서방문화의 생기발랄한 도전앞에 기타 다른 문화생태는 너무도 취약하고 무력하다. 이는 마치 시들어가는 꽃잎처럼 점점 색이 낡아지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아픈 문화생태균형의 파괴가 아닌가? 한국인들은 그러나 현대화 과정에서 본국문화를 신임한것은 너무도 존중을 받을만한 일이다.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모자라는가(6--2)

한국인은 이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가장하는것이 아니다. 또한 문화반역 심태에서 출발한 졸렬한 연극도 아니다. 한국문화인들의 거동은 전통에 대한 심각한 리해와 자신감에서 출발한것이며 그들 성격중에 내포된 천진하고 질박하며 일거수 일투족에도 집착하는 처사작품인것이다. 하늘을 치솟는 고층빌딩과 고속으로 번식하는 고속도로의 촉각이 사면팔방으로 다 뻗쳐 나간 그 배경에서 그들이 견지한것은 존귀한 의미가 있다.

텔레비전화면에 일본 천황이 영국을 방문하는 뉴스장면이 나타났었다. 환영의식에서 주인은 옛날의 네바퀴마차에 동방에서 온 귀빈을 모셨다. 황실의 위병들은 전통적인 잉글랜드 군복을 착복했다. 백금장식을 한 궁문앞에서의 교환의식은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변하지 않은 그대로이다. 인도인들은 외교의식때에는 자기들의 독특한 코끼리무리를 끌고 와서 손님을 환영한다.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전통적인 명절이면 다 민족복장을 착복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외교장소에 나설때면 검정색 작은 모자를 쓴다. 텔레비전에서 아프리카손님이 방문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그들이 괴상한 두루마기를 입은것을 보았을것이다. …… 아프리카 사람들은 평소에 그런 옷을 입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세계앞에 나설때면 그들은 자기네 민족복장을 아주 장중하게 입는다. 이것은 하나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한것이다.

이미 작고한 모택동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하나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도리로 한 민족도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무엇이 모자라는가(7)

한국에 고풍이 존재한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인 도의문화를 숭상한다. 이른바 도의문화의 내용이란 결국 중국 전통문화중의 충의와 절개이다. 중국사회는 충의와 절개를 가장 창도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충의와 절개는 왕조가 바뀔때 일부 의사들의 선혈이 랑자한 특허물에 불과했다. 이것은 보통 민중들이 배나 부르게 먹고사는 그것과는 전혀 별다른 문제였다. 혹은 이것이 전통 종목중에 나타나는 전설이나 이야기에 불과했다. 지어는 깡패들이 술좌석에서 허장성세를 보여주는 맹세로 전락되였다. 보통 백성들은 그런것이 듣기에는 뜨르르하고 그럴듯도 하지만 실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정신장식품이라며 버린지 오래다. 백성들은 배불리 먹기 위한 일에 진신투구로 투입했다. 필자는 중국인들의 경력이 너무 많고 겪은 풍랑이 너무 많으며 고난이 너무 많고 허위도 너무 많으며 기편도 너무 많은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본다. 이것은 마치 한장의 종이장이나 같다. 너무 부비고 부비면 당초에 하얀 종이가 색이 날고 당초에 반듯한 종이가 쭈그러진다. 이것은 또한 강과도 같다. 많은 곡절을 겪고 너무도 많이 오염되면 원래의 안색이 전혀 없어지게 된다.

여기까지 필을 날리고 보니 언제 어느 책에서 본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진나라 이전의 책을 보면 그때 중국인들은 정말로 호매로왔고 의기가 충천했다. 특히 그들이 진정한 사람들일가 생각해보게 했다. 그래서 중국에는 춘추정신밖에 없으며 춘추인격밖에 없는가 의심할 때도 있다.

이런 인격의 특점이라면 곧 자존, 치욕을 알고 자기를 망각하고 리타를 추구한다는것이다.

이 문장의 작자도 동남아 금융위기때 한국인들의 표현을 언급했다. 그는 이 문장의 마지막에 ‘그래 춘추정신이 이제는 한국으로 전이하고 말았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동으로 전이한것이 아니다. 이런 정신은 한때 중한 두나라 인민들이 공유했던것이다. 그런데 장백산 이남에서 몇천년간 봉페되였던 정결하고 직박한 3천리 강산에서는 이 정신의 본색을 보존했을 뿐이다.

서로 다른 민족

시합장소에서 중한 량국간 게임이 진행된다고 할때 독자들은 우려가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중국팀이 크게 앞섰다고 해도 절대 불길한 예감을 버릴수 없기 때문이다. 몇번이나 겪은 일이지만 중국팀은 최후 몇분간에 상대방에 의해 승패를 새로 쓰게 되였다.

수많은 중한 대항중에 중국축구는 한번 또 한번 이른바 "흑색3분간"이란 치욕을 당했다.

2002년 녀성배구 월드컵경기때 중국 배구는 너무도 뜻밖으로 한국팀에 패배하여 4강에서 밀려났다. 번마다 최후 몇분간에 한국팀이 점수를 넘어섰다.

도요다컵 바둑시합도 마찬가지이다. 20여세밖에 안되는 왕뢰가 줄곧 우세를 차지하다가 50살이 넘은 조훈현의 몇수에 그만 전반국면이 혼란한 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이상한것이 있다면 같은 오유를 자꾸만 중복한다는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간단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남자롱구 전날 "체단주보"는 중국이 획득할 금메달을 이미 총상패방에 기입했다. 이튿날 시합중에 중국팀은 줄곧 앞섰다. 그리하여 구경거리가 없게 되였다. 아무런 현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마지막 몇분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후에 있은 스포츠뉴스에서 중국팀이 마지막 51초사이에 한국팀에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한번 마지막 고비에서 꼴을 먹은것이다.

중한 선수간에 차별이 있다는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다 같은 황종인이지만 말이다.

세계 100여개 나라중에 한국은 중국과 가장 상사한 국가이다.

그러나 두 나라 국민들은 허다한 방면에서 상당한 부동점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60년대 한국의 산은 민둥산이였는데 지금은 다 울울창창한 숲을 이루었다. 한국은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가는곳마다 얼마나 깨끗한지 모른다. 쓰레기를 함부로 던지는 일이란 전혀 없다.

한국인들은 환경보호를 아주 중히 여긴다. 식당에서 쓰는 이쑤시개는 전분으로 만든 록색제품이다. 아무리 호화한 호텔이라고 해도 일회용 치솔과 치약을 쓰는 법이 없으며 또한 일회용 끌신도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 쇼핑할 때면 그 어느 상가도 비닐주머니를 제공하여 주지 않는다. 구입자가 종이박스를 구입해 써야 한다. 한국인들은 자기의 객실을 사랑하는것만큼 국토를 사랑한다.

중국에서 관광할때 기차를 타고 내다보면 철도 량켠의 나무와 풀에 걸린 비닐쓰레기는 마치 하나의 백색띠처럼 길손의 눈길을 떠나지 않는다. 중국 북방의 산을 보면 민둥산이 푸른 청산보다 많은것을 발견하게 된다.

서쌍판나의 삼림 피복률은 60%에서 30%로 떨어졌다. 중국 초원의 3분의 1은 이미 퇴화되였다. 동시에 해마다 2만평방킬로미터의 속도로 퇴화되고 있다. 전국의 수토류실속도는 1년에 1만평방킬로미터이다. 사막은 해마다 2460평방킬로미터의 속도로 증가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 환경보호기금회의 조사중에 4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환경보호란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것이 나타났다. 그리고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환경보호 실태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

중국은 ‘4서5경’, ‘충효인의’를 봉건찌꺼기라고 인식했으며 사당을 수건하고 족보를 정리하고 조상에 제를 지내는것을 봉건미신활동으로 치부했다. 각지의 "공자묘"는 문화대혁명기간에 거의 다 파괴되였다. 전통적인 전적은 한쪽 구석에서 먼지에 쌓여있다. 한국의 공자묘는 아직도 그대로 완전히 잘 보관되여 있다.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해마다 2월과 8월초하루에 공자제를 지낸다. 지금 한국의 사회공중도덕은 여전히 중국 송나라때 제출한 "8덕(八德)"이다. 즉 "효제, 충신, 례의, 렴치"이다. 한국인들은 족보를 아주 중시한다. 한국에서는 추석기간 사흘을 공휴일로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묘차 귀향하여 조상에 제를 지내고 조상의 은덕에 감사를 드린다.

중국에서는 한때 미국 영화를 선호했다. 최근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중국을 석권하고 있다. ‘탄타니크호’란 영화가 상영될 때 중국은 영화입장권매출에서 력사기록을 창조했다. 이 영화는 그 어느 영화보다 중국의 돈을 많이 쓸어갔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이코트했다. 리유는 아주 간단하다. 가령 300만 한국인이 이 영화를 본다면 한국의 모든 외환비축금이 다 미국으로 흘러간다는것이다. 영화학가들은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헐레우드와 유럽영화에 비하여 자국영화를 더 선호한다."

중국인들은 어릴때부터 애들에게 손해를 보면 안된다고 교양했다. 중국 대학식당에서 밥을 살때 학생들은 밀고 닥친다. 한국에 류학간 중국류학생들은 한국 대학식당에서 다른 풍경을 보았다. 학생들은 아주 자발적으로 줄을 지어 선 다음 자기 차례가 되면 식권을 박스안에 던져 준다. 누가 이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공원에서 아래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서로 모르는 어린이들이 자기가 먹던 식품을 다른 어린이에게 나누어준다. "처음 왔을때 나는 우리 집 애들에게 그런것을 함부로 받아먹으면 못쓴다고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도 우리 집 애들에게 자기 식품을 다른 애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일러주군 했었다."

축구는 이제 더 비교하지도 말자. 그 대신 축구팬들을 비교해 보자. 한일월드컵 기간 한국 축구팬들의 표현은 전 세계에 지극히 심각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통일복장을 착복하고 통일용구를 쓰고 통일구호를 부른다. 수만명 축구팬들이 적색의 파도를 이루어 "대한민국"이라고 높이 웨친다. 이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진동을 전달해준다. 그런데 중국 축구팬들은 량적으로 보면 적은편이 아닌데 그저 40∼50명이 한 동아리가 되여 소규모 응원활동을 전개했다. 그나마 통일복장을 입지 않았기때문에 눈에 선명하게 띄우지도 않았다. 자연히 강대한 응원합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외려 란잡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시합이 끝나면 한국 축구팬들은 자기주변의 쓰레기들을 말끔하게 거두어 간다. 그러나 중국 축구팬들이 앉았다 떠난 곳은 쓰레기 천지이다. 그중에는 작은 오성 붉은기도 널려 있었다.

회피하지 못할 편견

한 볼리비아국적 중국인이 인터넷에 이런 말을 올렸다. 자기는 남아메리카에서 민족적 차별시를 자주 받는다고 썼다. “이 국가에서 당신이 가령 일본인이라면 아주 존중해 준다. 당신이 가령 한국인이라면 역시 당신과 친근하게 사귀려 한다. 한국의 제품이 좋다는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중국인이라고 한다면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POLLPRECO’(즉 ‘닭고기 맛이 좋다’란 뜻이다. 그곳에는 중국인들이 꾸리는 식당중 닭료리 식당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한마디 말을 던질뿐이라고 한다. 원인은 최근 몇년 이곳으로 밀항한 중국인이 많아짐에 따라 신분에 먹칠하고 국가 이미지를 흐리는 일이 자주 생겼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 글은 필자에 대한 자극이 너무 컸다. 나는 발달한 국가에서 우리 중국인을 기시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후진국가에서도 다 우리 중국인을 기시한다는 말은 못들었기 때문이다. 발달국가는 우리를 ‘붉은 초롱불을 높이 걸다’에 나오는 긴 머리태를 딴 ‘청나라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듣는 말이지만 이른바 제3세계 소국의 국민도 우리 중국인들을 깔볼줄은 몰랐다.

그후부터 이와 류사한 소식에 별도로 신경을 썼다. 결과 번마다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미국에서 반년간 생활했다는 중국학생이 올린 글에 이런 단락이 있다. ‘중국 사람 10명에게 미국 대통령이 누군가 묻는다면 9명은 누가 대통령인지 다 안다. 그러나 10명 미국인에게 중국의 주석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겨우 한 사람이 중국의 주석이 누구인지 알뿐이다.’

한 서방국가는 ‘중국관광지남’에 관광유람객들에게 아래와 같은 사항을 고지했다. 즉 중국사람들은 아래 몇가지 방면에 부동한 점이 있다고 고지한것이다. ‘첫째, 공공도덕이 결핍하다. 가는 곳마다 되는데로 쓰레기를 던지고 물건을 구입할때 줄을 서지 않는다. 둘째, 법을 지키는 정신이 결핍하다. 이를테면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는다. 셋째, 봉사태도가 나쁘며 출근시간에도 한담을 한다. ……’

이제 더는 례를 들지 않는다. 이런 례를 들려면 얼마든지 있다. 이제 례를 더 든다면 정말로 듣기 거북한 말들이 막 튀여나올것이다. 필자는 마침내 한가지를 터득하게 되였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상담은 관광객들이 중국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중국을 찬송하는 그런식의 친적인의 말만 있는것이 아닌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중국이 취득한 거대한 성취에 대한 장편찬송가만이 아님을 알게 되였다.

물론 우에서 인용한 례문은 기실 하나의 편견이라고 하겠다. 동시에 일부 외국인들의 일가견에 불과하다. 그들이 접촉한 중국인은 극히 제한된 국부 사람들이기 때문일것이다. 이러한 기시와 편견앞에 우리는 얼마든지 분개할 리유가 있고 얼마든지 그들을 반박할 리유가 있다. 또한 각종 각양의 원인을 찾아 해석할 리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차별시와 편견을 두고 미소를 담아 부드러운 한마디로 받어 넘기거나 전혀 거뜰떠 보지도 않는 그런 립장을 취할 리유는 없다. 우리는 외국인의 찬미가만 수집하고 귀에 거슬리는 그들의 말을 마이동풍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런 편견, 편격 나아가 악독하다고 할수 있겠지만 그들이 지어는 타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 아무런 리유가 없는것이 아닐것이다. 우리는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반성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우리 이 민족이 기타 다른 국가에 준 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수 있으며 또한 정확히 자기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다. 이것은 민족 부흥의 위대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데 유리할것이다.

우리 이 민족자체에 그 어떤 엄중한 결점은 없는가? 쉽게 례 하나만 들어도 이 물음의 대답은 분명해진다.

국내의 대소 도시를 돌아볼때 가장 먼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것은 각가지 "증서"를 제작해 준다는 광고일것이다. 중국 도시의 골목과 골목마다 이런 광고가 당당하게 객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공문서 위조를 이처럼 공공연하게 광고하는것은 아마도 세계 각국에서 유독 중국만이 가능할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기시하는것에 분개해 한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우리가 무엇때문에 남들의 기시를 받고 있는가를 잘 반성해보아야 한다. 분노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때문이다.

중국인의 국민성격 연혁 궤적(1)

사람들은 산천은 변하기 쉬워도 사람들의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민족성격은 사실 부단히 변천한다. 『춘추렬국전』을 번져보면 당신은 그때의 중국인들은 혈성이 왕성하다는것을 일견에 발견할수 있다. 조씨 고아, 7백 장사, 섭정이 협류를 사살한것, 형가가 진시황을 사살하려 한것 등이 다 읽는 이를 감동시키는 이야기들이다. 그때 당시 남자대장부들의 장렬함과 결연함을 보여주는것으로 후대에게 무엇이 의리를 중히 여기고 무엇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가 하는것을 가르쳐 준것이다.

춘추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그들의 단순함과 투명함에 경이를 금하지 못할것이다. 춘주전국시기의 중국인들은 정말 멋있게 살았으며 값있게 죽었다. 후래자들이 볼때 그들은 혹시 졸렬하다고 볼수도 있다. 간단하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소년들처럼 생명의 숭엄함과 화려함과 밝음을 감각하게 된다.

주변 민족이 아직은 깊은 잠에서 깨여나지 않았을때 중국인들은 이미 사상계몽을 시작했다. 그 시기 중국인들의 사상은 아주 활약적이였고 지혜는 아주 분방했으며 지성인이 많이 배출되였고 학설이 많이 형성되였다. 사상 청춘기에 들어선 그들은 창조적인 충동과 호소의 욕망에 넘쳐흘렀다. 조기 중국 문명사의 하늘에 한가닥 눈부신 찬란한 아침해살이 비쳐난것이다.

그러나 가석하게도 이와같은 좋은 풍경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겉으로 봐서는 취약한것 같지만 내심은 아주 랭혹한 영정이라는 사나이가 휘두른 검에 중국의 청춘기가 결속되였다. 진시황의 잘못은 그가 중국을 통일한데 있는것이 아니며 그가 만리장성을 구축한데 있는것도 아니다. 그의 잘못은 그가 천하의 사람을 다 자기의 수렵물로 오인한데 있다. 그의 스승 한비자가 그에게 진언했다. "사람이란 본성이 아주 비렬한 동물이다. 그들이 갈망하는것은 리익이며 그들이 두려워하는것은 폭력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존경스러운 존재가 아니며 또한 믿을만한것도 아니다. 천하를 통치하는 방법은 단 하나 -- "궁내에서 긴 채찍을 내리치는것이다." 술법과 위세를 빌어 천하사람들을 속박하고 조종하면 된다. 이것은 마치 차를 끌고 가는 성축을 길들이는것과 다름이 없다.

중국인들이 영웅호걸이라고 부른 이 사나이는 폭력기초에 세운 통치방법을 창립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다 자기 한 사람의 노예로 만든것이며 자기의 머슴으로 만든것이며 자기의 차를 끌고 가는 성축으로 만든것이다. 그가 ‘분서갱유’하고 ‘관리를 스승으로 모시고’ ‘우둔한자를 우두머리로 세웠으며’ 민중의 자존과 사상을 거세했다. 그리하여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거리로 내쫓고 속으로 욕하는 사람은 주살하고 길이 바로 눈이다’라는 정도에 이르렀다. 중국인들의 집단인격이 그때 처음으로 조폭하게 짓밟힌것이다. 사람들의 존엄은 그때로부터 전무하게 되였으며 수단을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들이 이 엄혹한 사회의 적합한 존재로 부각되였다.

한고조 유방은 전형적인 대표인물이다. 초한 전쟁중에 류방은 항우에게 전혀 대상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패배의 쓴맛을 보아야 했다. 그는 아들딸과 모사 등공을 데리고 차를 타고 도망갔다. 그는 차가 빨리 달릴수 있게 하기 위해 수차나 두 애를 차에서 밀어냈다. 등공이 다시 그 애들을 차에 안아 실었다. 류방은 '노기 충천하여 수하 10명의 수급을 자르려 했다.’ 항우는 류방의 부친을 잡아 그 살로 안주를 하겠다고 류방에게 공갈했다. 류방은 이 말을 듣고 정말 술안주를 만들었다면 자기에게도 한 숟가락 퍼 달라고 말하며 얼굴에 웃음을 게발랐다.

사기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고조는 글을 별로 배우지 않았지만 성격이 활달하고 모략이 좋으며 사람들의 진언을 잘 접수한다. 감옥의 문지기나 군졸들도 아주 스스럼없이 대해준다.’그는 친화력이 좋다. 감옥대문을 지키는 사람이나 군졸들도 그와 부담없이 대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돌리면 배은망덕한 일을 아무런 부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다. 그가 금방 천하의 일인자로 되자 한때 자기를 협조하여 천하를 탈취한 사람들은 하나 둘 처치하기 시작한다. 거치른 말이 막 튀여나가는 지방 깡패의 승리는 항우의 고귀함과 리상주의가 이미 통일된 중국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것을 고지한것이며 수기응변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렬한 자들이 외려 한자리를 차지할수 있다는것을 선고한것이다.

진한이래 중국은 날따라 성숙된 ‘왕도와 패도가 짬뽕이 된’통치제도에 안치되였다. 중국인민은 상대적으로 봉페된 환경에서 해가 뜨면 일터로 나가고 해가 지면 귀가하는 생활에 적응되였으며 상고사회부터 전해 내려온 단순함을 보류하게 되였다. 중화문명은 주변 국가보다 퍽 앞섰다. 중국인민은 당당한 대국의 자호감과 자신감에 취했다. 이런 자신감은 당나라 시기에 고조에 이르렀다.

당나라는 중국인들의 영원한 자랑이며 영원한 회억이다. 그 시기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였다. 중화문명의 찬란한 빛발은 유럽까지 비쳐갔다. 중국의 주변국가는 중국에 분분히 경의를 표했다. 아무런 보류도 없이 중국을 따라 배웠다. 장안의 거리에는 유럽 대륙 각국의 화물이 진렬되였고 가는 곳마다 살색이 다른 각국 상인들과 구학자들을 볼수 있었다. 그 시기 중국인의 인격은 기본상 강의하고 개방적이며 락관적이고 건강 진취적이였다. 그때 당시는 아직 쪽발을 할줄 몰랐으며 도학을 론할줄 몰랐으며 패루를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이름할수 없는 계률같은것이 적었다. 녀성이 남편을 잃게 되면 재가할수 있었고 부부간 정이 맞지 않으면 리혼할수 있었다. 문인들은 화려한 문구로 성애를 공개적으로 송가할수 있었으며 시인들은 청신한 시로 생명의 열정을 노래할수 있었다. 중국 력사상 인격적으로 가장 건강한 당태종이 바로 그 시기에 출현되였다. 그는 아직 리지적이며 또한 인정미가 넘치는 사람이였다. 그의 경세지략은 출중했으며 또한 민중을 존중할줄 알았다. 가장 위대한 시인 리백도 바로 그 시기에 출현했다. 혹은 그는 바로 그 시기에만이 출현할수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의 호방한 시풍은 그 시기의 흉금과 기백을 충분히 표달했다.

그러나 재난이 많은것은 이 대지의 숙명이기도 하다. 당나라이후의 천여년간 중국 대지의 정권은 부단히 교체되였다. 외족도 부단히 침입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심리와 성격에 거대한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왕조변혁’이란 단어가 중국인들의 맘속에 뿌리내린 의의는 기타 다른 민족과 부동하다. 중국 도덕의 근저는 ‘충’과 ‘효’라고 말할수 있다. 임금이 있기에 백성이 있다. 임금이 망하면 백성도 망한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건곤의 대의이다. 한 녀성은 두 남성을 섬기지 않는다. 한 신하는 두 임금을 받들지 않는다. 왕조의 변혁은 그 누구에게나, 특히는 선비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고험이기도 하다. 왕조의 변혁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형구처럼 100∼200년에 한번씩 중국인들을 꽁꽁 묶어놓고 살을 베였다. 한 가족의 권력틀에서 벗긴 다음 강제로 다른 가족의 권력 틀에 이식했다. 번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물에 몸을 던지고’‘성우에서 떨어지고’‘온 가정이 분신’하는 등 장렬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굴욕적인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부분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격의 좌절이 아닐수 없으며 자아부정의 과정이 아닐수 없었다.

불행한것이라면 중국의 황제는 너무도 유혹적인 자리였다. 력대 황제들은 자기의 황위를 보존하기 위해 벼라별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왕조의 변혁 또한 너무도 빈번했다. 이것은 다른 국가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력사 현상이다. 일본처럼 만년을 이어가는것은 말도 말고 고대 조선왕조처럼 안정하지도 못했다. 당나라가 멸망된 이후 중국은 5대 10국을 경유하여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경유했다. 당나라와 송나라간 짧디짧은 54년간 중국 북방에서는 양나라, 당나라, 진나라, 한나라, 주나라 등 5개 왕조가 출현되였다. 그중 생존시간이 가장 짧은 후한은 불과 4년이란 력사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강재라고 해도 천번 만번 휘우면 굽어든다. 아무리 질박한 민족이라고 해도 이처럼 부단히 출현된 난처함과 어려움속에서는 자연히 냉혹하고 삭막해지게 된다. 중국인의 자존과 자신은 본래 충효를 기본으로 하는 도덕우에 세워진것이다. 그런데 왕조가 변혁될때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충효에 대한 파괴이며 유린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투항’에 대한 장려란 말이다. ‘24사’는 ‘24’차 파괴이며 유린이다. 주마등처럼 황제가 바뀌여지면서 그때마다 혈기는 조소를 받았으며 그때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과거처럼 자기 지조를 견지하지 않았으며 과거처럼 현실을 믿지 않았으며 과거처럼 투신하지 않았다. 단순함과 강인함은 이와 같은 한차례 또 한차례 휘여지면서 점점 퇴색되였으며 이 사회를 이어놓는 도덕은 점차 빈소리에 지나지 않게 되였다. 그 어느 방향에서 대군이 처들어오던간에 언제나 순민이라는 기발을 내 건 사람들이 있다. 향안을 마련하여 성문 량쪽에 꿇어앉아 대군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이것은 극히 소수 민족의 반역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중국인 국민성격의 연혁궤적(2)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움은 뒤에 있다. 송나라이후 꿇어앉아 대군을 영접한 천조의 백성들은 말안장의 힘을 빌어 천하를 정복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중원왕조에 강복한 사람들이며 비린내나는 날고기를 막 먹는 "오랑캐"라는것을 알았던것이다. 중원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또 한차례 거대한 심리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몽골 철기의 야만적인 도살앞에 원래 천조대국의 백성들은 ‘말등공민’이라는 치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백년에 달하는 몽골귀족의 폭정을 참고 견디여야 했다. 만주인이 남하했을 때는 한족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했다. 사람마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아 다쳐서는 절대 안되는’ 머리칼을 깎아 앞머리에 동전만한 번대머리를 하고 긴 머리태를 따야 했다. 이를 두고 ‘동전에 쥐꼬리’라고 했다.

굴욕을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생존상태에서 인격의 건강함은 당연 파손을 보게 되여있다. 송조는 비록 쇠약하긴 쇠약했지만 양가네의 항쟁 장군과 악비와 문천상 같은 민족영웅들이 하늘 높이 우뚝 서있었다. 이에 따라 보통 백성들의 항쟁도 봄날의 들불인양 끝임이 없었다. 그후 점점 많은 사람들이 령혼과 신체의 분렬에 습관되였다. 그들은 점점 더 대도리와 실제 행동을 분리했으며 점점 더 많은 중국식지혜가 발전했다. 례하면 ‘아무리 영광스럽게 죽는다해도 겨우 사는것보다 못하다’, 이를테면 ‘얼굴에 침을 뱉으면 자기가 닦는다’라든가 또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하늘이 틔인다’라던가 또는 ‘모두 다 제집 문앞의 눈은 쓸지만 남의 집 기와장위에 얼어붙은 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라는 말들이 성행했다. 항일전쟁시기 헤아릴수 없는 크고 작은 한간이 나타났는데 누가 이것을 력사의 우연성이라고 말할수 있단말인가?

왕조의 변환, 이족의 침입과 더불어 독재통치는 날로 더 엄밀해졌다.

진시황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황제들은 다 같은 한 문제를 사고했다. 즉 어떻게 하면 황제자리를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진나라이후 1300백년간 중국정치에서 고려하는 기본문제였다. 모든 황제들은 이 문제 때문에 발편 잠을 자지 못했다.

답안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다른것이 아니라 백방으로 민족의 활력을 말살하는것이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사색하는것을 허락할수 없었으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묶는것을 제지했으며 황권에 대한 그 어떤 위협세력도 다 소멸했다.

통치자가 전반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구비례가 아무리 미소하더라도 일단 절대권력을 장악한 후의 그 사회는 그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비록 그 방향이 아무리 황당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절대 다수 사람들에게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말이다. 하여 1300년 간 중국사회는 흔들림없이 점점 더 엄밀한 독제와 점점 더 굳어진 방향으로 걸어왔다.

진시황이 통일된 제도를 건립한 이래 한무제는 또 백가를 페출했고 유가 독존을 실시했다. 이런 형식을 통해 사상독재를 추행한것이다. 당태종은 과거제도를 통해 전사회의 자력자원을 공명과 이록이라는 이 한 방향으로 집중시켰다. 이로써 지력활동의 다차원, 다방향 발전을 방지했다. 원조 황제는 리갑제를 실시하였으며 련좌제도 실시를 강화했다. 한인들이 병기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지어는 주방에서도 칼을 쓰지 못하게 했다. 주원장은 승상제를 취소하고 소농본능에 기대여 중국사회를 하나의 대형 마을로 고쳤다. 그는 모든 일에 다 참여하는 이장이 되였다. 전국 백성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서 살고 그 집 뒤에는 어떤 나무를 심으며 집 뜨락에는 닭 몇마리를 길러야 하는것까지 시시콜콜 다 그 한 사람이 규정했다. 청나라에 와서는 아예 내각도 취소했다. 천하를 완전히 한 사람의 천하로 만든것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청나라 가장 위대한 3대 황제인 강희, 옹정, 건륭은 필화를 극치로 저질렀다. 한 도사가 사람들은 대뇌로 생각하지 맘으로 생각하는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가 강희에게 걸렸다. 강희는 그에게 ‘위험한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처형했다. 정신병환자가 발병했을때 자기가 황제라는 말을 했다가 건륭에게 걸려 릉지처참을 당했다. 필화는 조정대신간에도 서로 통신을 감히 하지 못하고 일기를 감히 쓰지 못하는 정도로 성행하였다. 일단 남들에게 ‘감’을 줄가봐 두려웠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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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mbek 2004.12.04 09:42
    죄송하지만 이글을 쓰신 분이 중국 조선족이 아니신지요? 저는 중국의 한족이라는 민족적 일체감을 가진 집단이 왜 이리 많은지 궁금합니다. 최초로 한족인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보다는 오랑캐(주로 북방 유목 민족)가 주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것이 한족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그럼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은 무언가라고 물으신다면 한번 되짚어 보십시오. 소수민족이 중국에 편입된 것은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과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다거나 중국내 오지에 거주하여 예로부터 무시되어 온 지역민이라는 것입니다. 지나(China) 거주민들의 상당수는 본인들이 혈통적으로 한족이라고 생각하고 현재 공민증에도 한족으로 분류되나 본인 생각에 이는 문화적 일체감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소수민족은 중원 정복자의 전리품일 뿐이고 강제로 이주 당하거나 노예로 팔렸거나 현지에 파견된 관리들로부터 학정을 겪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중국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은 이러한 정책이 아닌 동화정책을 중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읍니다. 즉, 쌀 많이 먹는 조선족은 한족보다 쌀을 많이 주고 모든 정치/사회 집단내 지도층 비율에서 소수 민족에 대해 특혜를 주고 등등. 그래서, 소수민족들은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며 당연히 말도 몽고어에 영향을 많이 받은 현대중국어를 모국어로 여기게 될 것이고 공민증에서 민족표기를 없애고 자치권의 권한도 축소되고 ... 그러면, 언젠가는 이들도 어엿한 한족으로 거듭날 겁니다. 물론, 특정 종교를 가진 소수민족은 동화의 기간도 길고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조선족은 취약하다고 할 수 있겠읍니다.
    서양에서의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한 인식은 서양인들이 문명화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경애감과 신비감에서 침탈의 제국주의 시대 갖게 된 우월감과 야만성까지, 그리고 최근 중국의 정치/사회적 일면들이 여러 지적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달리 인식이 되고 있읍니다. 중국 국적인으로서 외국에 나와 보니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 아니더라는 자각은 제 생각에 중국인들에게 약이 될 거라고 보며 과거 중국인들이 이룩한 업적(도자기 발명, 화약 발명 등등)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을 갖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고 보구요. [01]
  • ?
    nuroc73 2004.12.16 15:15
    한국은 왜 중국과 다른가? 첫째, 핏줄이 다르다. 둘째, 언어가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는 놀랍게도 핀란드어와 같은 계통의 우랄 알타이 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한국이 싱가포르나 타이완, 베트남, 말레이지아, 홍콩 등과 같은 중국판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중국인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몽골이나 티벳이 중국이 아닌 것처럼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유교를 중국의 유교와 같다고 보는 것 자체가 몰상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중국의 천주교와 프랑스의 천주교가 같다고 말하는 것 보다 더 어이없는 비교인 것이다. 또한 이는 용인 민속촌에서 조선족 동포가 중국식 계량한복을 입고 널뛰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뜨악함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며, 한 중국인이 북한의 우스꽝스런 모택동식 대형 퍼레이드를 손가락질하는 것을 볼때의 불끈함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데체 누구로부터 배운 서커스 였던가? 더불어, 독립 운동가의 3대 손에게 한국인이 같는 존경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모든 독립 운동가 3대손이 그들의 할아버지와 같은 정신과 가치를 가졌는지에 대한 의문은 우리 모든 한국인들이 같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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