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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인이 한국과 중국을 비교한 글입니다. 중국인들은 대체 어떤 시각으로 한국을 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어서 퍼왔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 나누어서 게제하는 바입니다. ♨

장굉걸 원저 적현 편역
일본을 배울것인가 아니면 한국을 배울것인가( 서언을 대체하여)

한국은 중국의 현대화 경로에서 아주 훌륭한 거울이라는것은 의심할바가 없다. 한국이 어떻게 전통문화중의 부면요소를 제거했는가 하는것을 관찰하고 한국이 어떻게 전통문화중의 유익한 요소를 현대화변혁의 요구와 결합했는가 하는것을 료해하며 한국에서 번데기를 나비로 전환하는 과정에 겪은 고난과 어려움과 기쁨과 고통을 참작하여 그 경험을 살리고 교훈을 섭취하는것이 중국에 유익한것은 의심할바가 아니다.

국정이 다른 일본

서방사람들이 증기륜선을 타고 아시아동부 해안에 나타났을때 그들은 두가지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가지는 전설중의 강대한 제국이였던 중국이 전혀 원기가 없고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가지는 위기앞에서 보여준 일본의 명지함과 민첩함이다.

그 어느 나라도 일본처럼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서방의 위협에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본은 전력 투구하여 서방을 따라 배웠다. 근근히 40여년이란 시간에 보잘것없던 소국이 세계적인 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언제나 큰 형님으로 자처한 중국은 실패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현대화의 진척은 첩첩 앞길을 가로막은 좌절과 궁지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100여년이 지난 1949년에야 비로소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전 공업화수준에 처해있었다.

일본의 성공과 중국의 실패는 이처럼 너무도 선명한 대비가 되였다.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것이 중국인의 공동한 인식으로 되였다. 1898년 강유위가 광서황제에게 진언했다. 일본은 중국과 동문동종이며 국정이 비근하다. 일본인들이 한것을 우리도 얼마든지 할수 있다. " 때문에 갱신의 법은 일본을 떠나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변법은 일본을 따라 배우면 족합니다." 1907년 사절단으로 일본에 건너간 대신 달수도 광서의 "정적"인 자희태후에게 이와 비슷한 진언을 올렸다. "지금 중국은 개혁을 추진하려하고 있는데 그 상황이 일본과 아주 상사합니다. 각국에서 한 두가지씩 섭취하되 일본의 경험과 교훈을 섭취한다면 애쓴것보다 효과가 더 좋을것입니다. " 손중산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삭발하고 일본 이름을 짓고 일본인이 제단한 양복을 입었다. 그는 중국을 일본과 같이 강대한 나라로 발전시킬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다시금 국문을 연것은 20세기 80년대의 일이다. 이때에 와서야 일본의 경제건설경험을 소개했다. 중국인이 일본을 따라 학습할 서적들이 사태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본은 또 한번 중국개혁의 첫 선생이 된것이다.

그러나 백년간이나 일본을 배운다고 했지만 그것은 엉터리였다. 강유위의 변법은 너무도 빨리 실패했다. 광서황제가 백여편의 칙서를 반포했지만 중국사회는 아무런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자희태후가 일본의 헌정을 본딴다고 하면서 일본의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제 일본과 강성함을 비길때가 있을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던졌다. 그러나 호랑이를 그린다는것이 그만 개를 그리게 되였고 입헌운동은 결국 꼭두각시의 춤으로 변하고 말았다. 손중산과 장개석 두 세대의 노력이 있었지만 중국을 통일하고 강대하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개혁개방이래 중국은 국정에 알맞은 중국식발전도로를 모색하게 되였다. 그중의 하나가 서방 국가의 선진적인것을 학습하는것이다.

일련의 소망과 결과는 어깨를 스치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일본의 경험을 중국에 접목하는것은 취할바가 못된다는것을 설명하여 준다.

원인은 일본과 중국은 지정학적 조건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라고 하면 중국인들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성구가 있으니 그것은 "일의대수(一衣帶水)"와 "동문동종(同文同種)이란 성구이다. 모든 중국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일본은 중국의 학생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장안성을 가져갔고 4서5경을 가져갔으며 삼국지를 가져갔고 차도(茶道)와 화복(和服)을 가져갔다. 백여년간 중국인들에게 착각이 생성되였다. 즉 중일 량국은 국정이 상동하기 때문에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경험이며 가장 유용한 경험이라는 착각이다.

이것은 틀려도 한참 틀린 견해이다.

일본은 원래부터 아주 특수한 민족이다. 그들은 이 지구 기타 다른 모든 민족과 아주 큰 부동점이 있다. 그런데 이 부동점을 표달하기란 쉽지 않다. 번니 디커트가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했다. "일본과 판가리 결승전을 벌린 적들중에 일본인의 성미는 가장 알기 힘들다." 리광요는 또 "일본은 보통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일본은 아주 특별하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실상 일본의 사회구조와 중국은 너무도 크게 다르다. 일본은 중국보다는 유럽쪽과 더 흡사하다. 고대 중국은 관료통치를 실행하여 천하는 황제 한 사람의 사유재산이였다. 그러나 력사상 일본은 유럽과 류사한 장원령수제(莊園領袖制)를 실행했다. 일본의 장자계승제, 등급세습제와 천황, 막부 두 권력중심제, 그리고 무사제도와 같은 특징은 유럽대륙의 다른 한 끝인 서유럽과 너무도 상사했다. 그러나 한줄기 띠같은 물을 사이 두었다는 중국과는 완연히 다르다.

학술적 해석은 직관적이 되지 못한다. 이제 몇가지 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중국의 황제는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 중국의 황제는 일언당(一言堂)을 실행한다. 황제의 말 한마디면 된다. 그러나 일본은 고관대작들이 권력을 공유하고 있으며 집체적으로 결책한다. 일본황제는 어찌보면 너무도 가련하다. 일본 황제는 명의상 최고수장이지 실제로는 밥 먹는 문제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한 시대의 일본황제는 너무도 빈궁하여 자기의 서예품을 팔아서 돈을 해결했다고 한다. (둔쇼르 ‘일본인’)

중국은 유가를 숭상했으며 사상독제를 실행했다. 유가사상은 모든 사회성원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사유를 굳어지게 하는 교조적인 교화로 전락되였다. 그러나 일본의 통치계층은 세습무사들이다. 그들은 리성주의자들이다. 지식인들은 주로 참모역할을 발휘하던가 막부의 식객으로 있었다. 때문에 전반 사회는 실제를 아주 중요시했다. 아편전쟁이후 위원이란 사람이 ‘해국도지(海國圖志)’란 책을 썼다. 이 책은 외국의 형세를 소개한 책자이다. 중국 지식인들과 관료들은 이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은 중국에서 절판되였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책을 보물로 간주하여 련속 재판했다.

중국에서는 다자다복(多子多福)이라는것을 믿어왔다. 그러나 일본은 마세르 먼저 자각적으로 인구를 통제했다. 중국은 가정을 극단적으로 중요시한다면 일본은 집체에 충효하는것을 더 선위에 놓았다.

몇천년간 변화되지 않은 중국의 소농경제는 중국의 정치제도가 땅땅하게 굳어질대로 굳어지게 했다. 관료들은 고위층에서 빈소리만 치고 상인들의 지위는 아주 낮았다. 일본의 상품경제는 아주 발달되였다. 일본 상인들은 경제적으로 제후들도 견제할수 있으며 결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명치유신시기 일본경제가 쉽게 전환할수 있은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소농경제의 영향이 지금도 그 뿌리가 깊고 또 깊다.
……
일본인들이 신속하게 현대화의 대통로를 달릴수 있은것은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이 나라의 특수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사회구조와 현대화이전의 유럽과 상사하기 때문에 현대화 전환을 진행할때 봉착한 장애가 중국보다 훨씬 적고 또 적다. 일본의 경험이 일정한 정도와 일정한 범위내에서는 그래도 중국에서도 효과가 있을수 있다. 해방전 구중국은 마치 쇠약해지는 로인과 흡사했다. 낡은 관념에 눌려 있었으며 굳어진 독재정치체제의 족쇠를 차고 있었다. 때문에 부패하고 나약해진 관료대오가 소농경제의 방대한 군단을 끌고 사회전형의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간거하게 행진해 왔다.

고대 조선반도 중국문화에 대한 학습

력사상 조선반도는 장기간 찬란한 중화제국의 문화에 완전히 흡인되였다. 조선반도는 중국의 모든것은 다 완선완미한것이라고 인식했으며 지어 일거수 일투족까지 통채로 중국을 따라 배웠다.

조선의 리조개국 태조 리성계는 중국의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과 흡사하다. 그도 쿠테타를 발동하여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일가 일성이 천추만대로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중국 황제들의 통치술을 그대로 복제하였다. 문인을 중요시하고 무인들을 중용하지 않았으며 유가사상의 독재를 대거 추행했다.

리조도 과거를 통해 관료를 선발했다. 조선의 과거는 명나라때와 같이 완전히 독서인의 사상을 속박하기 위해 설정한것이다. 독서인은 4서 5경만 읽어야 하고 자기의 독립적인 견해를 발표해서는 안된다. 이런 과거고시는 관원을 선발한다기 보다는 독재제도의 수호자를 선발한다는것이 더 마땅할것이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4서와 5경중의 도덕교조에 익숙하지만 이런 륜리교조는 사회발전에 아무런 효익이 없다. 그 대신 통치계급에게는 너무도 유용한것이다. 리조의 관료들도 중국의 정형과 같이 ‘사지를 쓰기 싫어하고 오곡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권력을 독단했으며 사회영예와 물질재부를 독단했다. 무위도식과 기득권 획득이 관료들을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만들었다. (윤보운: ‘유가국가의 현대화〈儒家國家的現代化〉’)

관원들은 조정에서 사당을 결성하고 권리를 쟁탈했다. 명조의 동림당, 안당과 같이 조선 조정에는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간의 당쟁이 아주 치렬했다. 그 어느 붕당이 정권을 장악하든 다 다른 한 일파를 척결하고 관련자의 가문을 연좌 처벌했다. 명조가 붕당 쟁투때문에 멸망되였다면 조선은 붕당쟁투때문에 16세기 일본이 침략을 감행할때 그 앞에서 반항할 힘이 없어 속수무책이였다.

명태조 주원장은 백성들을 속박하기 위해 백성들을 리갑으로 편성해 통행증제도를 실시했다. 보통 백성들이 출생지에서 백리밖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관청에서 뗀 통행증이 있어야 외출길에 오를수 있었다. 통행증이 없이 먼길을 가면 범법으로 치부했다. 명나라 천하에서 생존하는 백성들은 감옥에서 사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리조는 이보다 더 철저했다. 리조시기 관청에서는 백성들을 아예 죄수로 취급을 했다. 명찰제도를 실행하여 사람마다 명찰을 차고 다녀야 했는데 명찰에는 성명, 년령, 출신과 주소를 명기했다. 관아에서는 수의로 사람들의 명찰을 검사했다.

리조는 명조와 같이 안정을 최고목표로 정했다.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관료계통을 통해 사회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백성들이 집회를 하면 사회안정에 불리하다는것을 감안하여 리조시기 서울을 제외하고는 고정적이며 영구적인 시장을 개장하지 못하게 했다. 리조시기 "호남"에 피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성립한 영구성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리조 조정에서는 그것이 안정에 불리하다고 시장을 취소했다.

여기서 꼭 언급해야 할것이 있으니 그것은 조선반도의 사상적인 독재이다. 조정에서 대거 제창하고 조선민족고유의 굴강한 성격은 조선의 독서인들로 하여금 중국의 지식인보다 더 완고하게 정주리학교조를 고수했다. 그들은 종교중의 원교지주의(原敎旨主義)와 류사하여 중국의 정주리학을 하나의 철학으로 접수한것이 아니라 천만년 지나도 불변하는 천하 사방에 던져도 변함이 없는 절대진리로 접수한것이다. 그들은 전국 상하가 정주리학을 조금도 변형이 없이 관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 학자 황병태(黃秉泰)가 말하듯이 한국의 유학은 ‘그 목적이 한국사회제도와 인민들의 문화수요를 충당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제도와 인민들이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영구적이며 보편적인 도덕이며 정치적준칙이였다.’ 리학은 지어 중국에서도 이와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때문에 조선 고대지식인들은 중국 명나라시기 례교로 사람을 잡아먹는 유생들보다 더 극단으로 나갔으며 더 인간성이 결핍했다. 그들의 주도하에 조선조정의 붕당쟁투는 중국보다 더 선혈이 랑자했고 타협이란 전혀 없었다. 조선통치계급은 사상상 절대 통일과 독재를 전력 추구했다. 그 어떤 이단 사교도 사정없이 진압했다. 조선 유학은 조선사회 각 방면을 마치 하나의 철판처럼 용접하여 그 어떤 변이의 충격이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면 그 즉시 배척했다.

총적으로 말해서 고대 조선통치집단은 ‘모든것은 안정을 위해’‘모든것은 천추만대로 복을 누린다’는 정치슬로건하에 각 방면에서 중국을 따라 배웠으며 중국보다 더 튼실하고 더 보수적인 독재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런 제도는 성공적으로 안정이라는 목표에 도달했다. 리조 조선은 장장 500년이란 긴 세월을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체제는 아주 엄중한 결함이 존재했다. 그것은 다른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개혁이 아주 어렵다는 이 점이다. 그 어떤 개혁이든 개혁은 다 낡은 리익의 균형을 파괴한다. 때문에 피가 흘러넘치는 권력쟁투를 경유할 때나 외래의 위협을 받아 국가의 사활이 엄중할때도 이 붕당쟁투는 여전히 중단되지 않았다.

서방의 충격이 오기전에 조선 반도사회에는 중국사회에 존재한 허다한 페단이 다 존재했다. 조선은 중국사회의 전진을 저애한 문화의 기본요소를 그대로 복제하여다가 그것을 더 확실하게 발육시켰다. 때문에 중국 현대화경로에서 한국이 어떻게 전통문화중의 부면적요소를 포기한것인가를 관찰하고 어떻게 전통문화중의 유익한 요소를 현대화개혁의 요구와 결합했는가를 리해하며 번데기를 나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루적한 한국의 비환고락을 섭취하여 그들의 경험을 배우고 그들의 교훈을 삼가하는것이 중국에 유익하다는것은 의심할바가 없다.

선진과 락후: 3백년간의 3편의 유람기(1)

청나라 건융 45년 6월 조선 사절단이 평양에서 출발하여 승덕으로 왔다. 조선 국왕을 대표하여 건륭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러 온것이다. 이 사절단 대오중에 박지원이라고 부르는 선비가 있었으니 그가 이번 중국행 행차를 력사에 남기였다. 선비 박지원은 문필이 우아하고 학식이 연박하였다. 그는 중국문화에 대하여 커다란 흥취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귀국후 중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을 ‘열하일기’란 책으로 써냈다. 이 책은 조선인의 시점에서 중국사회의 각 방면을 관찰하고 기록한것이였다.

‘열하일기’의 심태는 지금 중국사람들이 유럽이나 미국을 방문하고 유람할때의 심정과 너무도 상사하다. 즉 자기가 보고 들은것을 아무런 보류도 없이 찬미한것이다. 박지원의 눈에 당시의 중국은 지금의 미국이나 일본과 같아 더 없이 선진적이고 발달한것이였다.

금방 국문을 떠난 박지원은 변경 대안의 중국 도시를 너무도 흠모했다. ‘허리가 늘씬한 지붕은 숭엄하게 하늘을 떠받들고 있고 대문은 정체롭고 거리는 평탄하며 곧았다. 거리 량쪽은 노끈으로 그어 놓은듯이 반듯하고 벽과 담은 다 벽돌로 쌓았다. 차를 탄 사람들과 짐을 실은 차량들이 대통로 복판에서 행진하고 있었으며 매대에는 어디가나 도자기를 진렬했다. 그 제도는 시골맛이 전혀 없었다.’

박지원의 마음은 상할대로 상했다. 그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려 귀국하려 했다. ‘홀연 발길을 돌릴 생각이 났다. 그길로 돌아가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나의 등허리가 막 뜨거워났다.’ 원래 그는 선진적인 중국과 락후한 조선의 거대한 차별을 감내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는 자기들이 앞으로 계속 나갈때마다 자기 국가의 락후함을 느끼고 맘이 아파나는것이 두려웠던것이다. 그는 자기가 본것은 중국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 ‘천하의 동쪽 한끝’인데 계속 서쪽으로 간다면 그가 경악을 금치 못할것들이 너무 많을것이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중에서 보통 농가를 보아도 그는 찬미를 아끼지 않았다. ‘집들은 아주 가지런 했고 조금도 거치장스러운데가 없었으며 조금도 불결한것이 없었다. 우사칸도 도에 맞춰 지었고 두엄더미도 그림처럼 아주 보기 좋게 쌓았다.’

그 어떤 중국사람도 두엄더미를 두고 ‘그림처럼 아주 보기 좋다’고 묘사한 사람은 없다.

작은 읍에서 주숙할때마다 그는 집을 나서 주변을 구경했다. 그의 결론은 작은 읍도 ‘호화하고 수려하니 황궁이 있는 경성에 가면 얼마나 더 화려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중국의 창성함을 이로써 얼마든지 보아낼수 있다. 좌우 상포가 서로 빛을 뿌리며 창문에 세긴 조각이 찬란함을 자랑하고 있으며 기둥이나 대들보의 그림이나 금빛 찬란한 간판 등이 다 우리나라에는 보기 어려운것들이였다.’는것이다.

아주 민감한 관찰력을 구비한 박지원의 결론은 중국은 가는 곳마다 아름다우며 그 어느 방면이나 다 당시 조선보다는 우수하다는것이였다. 당대 중국 지식인들은 문안규정이 복잡하고 낡은 관습이 넘친다고 보는데 그의 눈에는 ‘중국의 그 어떤 일도 간단하게 되여 있지 복잡하지 않다.’ 그는 조선은 하루 빨리 전면적으로 중국을 따라배워야 락후한 면모를 개변할수 있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113년 후인 1893년, 중국은 이미 극도로 쇠약한 수렁속에 빠졌다. 렬강들의 릉욕하에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 시기 조선반도와 비한다면 그래도 많이 앞서고 있다. 그해 가을 중국의 무관 섭사성(晷士成)이 동북3성을 고찰하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자기가 조선에서 일기를 썼다. 그의 필끝에 나오는 조선은 전부 락후한 면모뿐이였다.

조선에 입국한 즉시 당지 관청에서 보위대를 령솔하여 그를 영접했다. 그는‘그 대오는 여전히 고대제복을 입었고 화총을 썼는데 그 화총은 중국의 조총보다 퍽 락후했으며 의복도 아주 우둔했다. 관청의 성벽은 불과 8측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잔돌들을 주어 쌓은것이며 집들은 낡을대로 낡았고 거리에는 온전한 길도 나 있지 않았다. 백성들은 문란하게 널려 살고 있었다. 그나마 다 초가집이었고 정원을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고 썼다.

이 단락을 읽고나면 무엇때문에 100여년전 박지원이 중국의 도시를 그처럼 경모했던가를 알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청에서 연회를 베풀어 중국의 귀빈을 청했다. 그는 또‘사람마다 작은 밥상 하나를 썼는데 그릇은 다 동으로 만든것이였으며 비린내가 나서 먹을수 없었다.’고 썼다.

며칠후 그가 본 부녕부(富寧府)는 또 다음과 같다. ‘시내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써 이곳의 백성들이 어떤 질고를 겪고 있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사람들은 다 게을러서 농사짓는 사람은 배부르게 먹을수 있으면 된다며 자산을 루적하려 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부딪치며 고대법에 따르려고 하지 변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독서인들은 거의 페물이나 다름이 없다. 편안하게 살면서 유람을 즐긴다. 이들의 문장은 문맥이 틀리고 필담을 몇 십마디 했지만 뭐가 무슨 내용인지 알수 없었다.’

조선은 섭사성에게 빈궁하고 조선 상층은 고대법에 따를뿐이고 변혁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 시기 중국인들의 관념은 이미 변동이 있기 시작했으며 서방을 따라 학습하기 시작했고 양무운동이 흥기할때였다. 당시 조선반도는 페관쇠국정책을 실시하며 외부에 대하여 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관찰자들은 섭사성처럼 조선이란 국가는 희망이 없다고 인식했다. 중일갑오전쟁이 발동된지 얼마후 조선주재 영국총령사 시리르는 자기의 편지에 이런 말을 썼다. ‘나의 관점은 이 나라에 대하여 일정한 체험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 그 어떤 계획을 설계하여 조선인에게 주어 관철하게 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부패는 범람할대로 범람했다. 이 나라는 개선될 희망이 전혀 없는 나라이다.’

1961년 한국은 여전히 ‘희망이 없는 나라’였다. 세계에서 가장 빈궁하고 정치적으로 가장 부패한 국가‘행렬에 들어있었다. 당시 중국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보다 더 빈궁했다. 미국인은 자기네들이 본 한국을 "밑굽이 없고 희망이 없는 심연’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각성은 일본의 초기 궐기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놀래웠다. 수천년간 잠을 자던 "은사의 국가"인 한국에 이처럼 사람을 놀래우는 잠재력이 있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1962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의 인구당 년 평균GNP가 83달러에서 1553달러로 껑충 뛰여올랐다. 18년간의 고속 증장은 한국으로 하여금 일약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할수 있었다. 조선, 자동차, 전자, 화학섬유 등 공업제품이 세계시장으로 줄지어 수출되였다. 시장경쟁에서 저력이 있는 경쟁력을 과시한것이다. 1988년에는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주최했다. 당시 서울올림픽은 력대 올림픽에서 가장 훌륭하게 치른 올림픽이란 평가를 받았다. 인구당 년평균 GNP가 6000달러를 초과했다. 비록 당시 한국의 인구당 년평균 GNP가 싱가포르, 홍콩과 대만보다 낮았지만 한국의 산업구조의 다양화 방면에서는 아주 성공적이였다. 공업화의 정도도 상기 세곳보다 더 심화되였다. 일부 기술밀집형 산업과 자본밀집형 산업에서 한국은 이미 미국과 일본의 강대한 경쟁적수로 되였다. 한국은 이로써 "제2 일본"이란 미칭을 듣고 있다.

1995년 한국의 인구당 년평균 GNP는 1만 37달러에 도달했다. 한국인은 1만달러시대를 앞당겨 실현한것이다. 한국경제의 실력은 세계에서 11위로 부상했다. 그들은 세계 톱 10 경제국으로 진입하려는 야심이 있으며 2010년에는 세계 톱 5강국(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한국)이 되여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려는 구상을 펼치고 있다.

지금 중국인들이 한국에 가면 200여년전 박지원이 중국에 왔을때처럼 가는 곳마다 감탄과 찬미를 금치 못한다. 또한 박지원과 같이 본국의 락후함에 마음 아파한다.

선진과 락후: 300년간의 3편 유람기(2)

박지원이 중국에 와서 중국의 정제된 도시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인이 한국에 갔을때 첫 깊은 인상이 바로 한국의 정결함이다.

‘북경과 선명하게 부동한것이라면 서울의 거리에는 우리 북경처럼 먼지가 날리던가 오염된 기류가 없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문자 그대로 먼지라고는 볼수도 없는 가두를 내놓으면 그대로 록음이 우거진 숲과 잔디밭이 보인다. 파란 하늘은 금방 씻은듯 티없이 맑고 깨끗하며 흰 구름이 유유자적 자유로이 하늘을 흐른다.’

박지원이 중국의 ‘두엄더미’를 찬미할때 ‘분변은 더러운 물건이다. 그런데 두엄을 만들기에 그것을 금처럼 여겼다. 길에는 재더미라고는 없었다. 말똥을 줏는 사람들이 마차뒤를 따랐다. 정방형, 혹은 팔각형, 륙각형 혹은 루대형으로 두엄더미를 쌓았다. 분변으로 땅을 걸구는 제도를 확립한것이다. ’ 그런데 지금 당대의 중국인들이 한국의 화장실을 찬미하고 있다.

‘서울의 공공시설은 아주 완벽하다. 그 중에서도 감개를 금치 못한것은 공중화장실이다. 호텔이나 대 주점의 화장실은 말도 말고 식탁이 몇개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대중식당의 화장실도 아주 정결하고 깨끗하다. 나는 수금하는 화장실을 보지 못했다. 그 대신 그 어느 화장실이나 다 수지를 제공하고 거울을 걸어 놓았다. 대형 직장의 화장실은 장애자전용칸을 별도로 설치했다. 그 디자인이 아주 세심한것이다. 이에 비해 볼때 우리 나라의 공중변소는 두려울 정도로 어지럽다. 한국에서는 변소를 화장실이라고 부른다. 정말 말그대로 한국의 녀성들이 화장실내 거울앞에서 눈섭을 그리고 입술을 칠하는것을 보았다.’(인터넷에서 뽑았음)

박지원은 중국의 보통사람들도 자질이 높다고 찬미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찬미하고 있다.

"사회기풍이 너무 좋았다. 그 분위기에 싸여 로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수 없었다. 교통질서를 준수하는것이 완전히 하나의 기풍으로 고착되였다. 그 누구도 거리를 함부로 횡단하는 사람이 없었다. 행인들은 다 횡단보도에서 푸른등이 켜지기를 기다렸다가 푸른신호등이 켜져야 길을 건넜다."

섭사성이 고대 조선사람들이 게으르다고 애석해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근면하다고 칭찬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거리에서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고 한 지방의 근면과 시간을 아끼는 정도를 알수 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는 도쿄거리에서 걷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미국사람들보다 빠르다. 그런데 홍콩사람들의 발걸음은 또 일본사람들보다도 더 빠르다. 필자가 관찰한데 의하면 한국인들의 걸음은 또 홍콩사람들보다 더 빠르다. 일본인들도 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일본사람들은 ‘지금의 한국인들은 과거 우리 일본인들처럼 사업에 아주 열중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간이 거꾸로 돌지 않았는가 하는 현훈감을 준다. 정말 30년은 하동에서 30년은 하서에서 박을 잡는다더니 겨우 몇십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과 중국간 선진과 락후의 지위가 완전히 드라마식으로 뒤바뀌였다. 이에 사람들은 아주 큰 의문에 유혹되지 않을수 없다. 이 모든것은 도대체 어떻게 발생된것인가?

이것이 바로 필자가 한국을 연구하고 한국에 관한 일련의 문장을 쓰게된 최초의 에너지이다.
냉대를 받는 한국경험(1)

한국이 궐기한 일련의 홍보소책자를 읽은 다음 필자는 돌연 이런 느낌을 갖게 되였다. 한국의 성공은 우리앞에 유교사회가 현대화물결의 충격을 받고 있는중에 또 하나의 다른 가능성을 제공하여 주었다는 감각이다.

한국의 성공은 크게 두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할수 있다. 첫째는 비교적 철저하게 현대제도를 접수한것이요, 다른 한가지는 비교적 완벽하게 민족의 전통적인 정신을 보유했다는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현대화과정을 통해 어딘가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계획경제수단, 군중운동방식, ‘나라를 위하여’란 헌신정신…… 이 밖에 다른 비밀이 없다. 변혁전의 한국사회와 중국사회의 동질성을 감안할때 우리는 한국인이 한 일을 중국인들도 얼마든지 할수 있다는 신심을 가질수 있다.

1978년부터 25년간 중국도 거대한 사회변혁을 진행했다. 또한 거대한 성취를 거두었다. 동시에 많은 경험을 루적했다. 그러나 한국과 비교할때 중국은 여전히 문제점이 적지 않다. 한국은 사회변혁과정중 이런 저런 문제가 출현되였지만 중국의 변혁보다 더 빠르고 더 순리로왔다. 말하자면 한국의 변혁은 중국보다 더 성공적이라고 할수 있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면 한국의 발전과 중국 변혁의 차이점은 아래 몇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한국의 발전은 근본적인 뿌리로부터 시작하여 장원적인 비전이 있고 정책이 흔들림 없었다. 한국은 교육을 십분 중요시했으며 과학기술도 아주 중요시했고 환경정화에도 커다란 중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일부 지역은 이런 관건적인 령역에 대한 조치가 한국과 비할때 아직 차이가 크다. 이를테면 토지를 람용한다던가 중공업이 루적한 밑천을 파먹는다던가 교육, 환경과 자원을 희생하는것을 대가로 한쪽으로는 발전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자신의 발전잠재력과 후생력을 파괴하고 있는것이다.

교육을 례들어 보기로 하자. 한국은 사람들의 기본 자질제고를 발전의 기초석으로 삼았다. 한국은 립국 초기부터 ‘교육선행’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허리띠를 조여 매면서도 교육을 틀어쥐였다. 때문에 교육은 줄곧 선위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장기간 발전도상의 국가에서 한국정부의 교육 투자비례는 줄곧 가장 높은 국가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나라의 인구당 평균 교육투자는 세계적으로 줄곧 락후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어는 발전도상의 국가에서도 우리 나라 교육투자는 가장 적은 몇몇 국가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국과 한국은 현대교육을 발전시키는 스타트를 같이 떼였다. 1945년 한국의 문맹률은 78%나 되였다. 중국과 비할 때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51년이 지난 1996년 한국 인구당 대학생비례가 37%에 달했다. 미국과 오스트라리아를 초월했다. 세계 제1위를 달리고 있다. 세계에서 교육이 가장 발달한 국가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한것이다. 중국은 그러나 인구당 대학생비례가 5%도 넘지 못했다. 세계에서 뒤줄에 선 위치이며 여전히 세계적으로 교육이 가장 락후한 국가의 하나이다. 한국의 비교적 높은 국민자질은 한국의 경제발전중에서 거대한 추동역할을 발휘했으며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창출했다. 이와같은 높은 국민자질이 있기때문에 아시아금융위기를 가장 빨리 헤쳐나올수 있었다. 한국은 기술경제령역에서 점점 더 큰 우세를 취득했다. 한국은 이미 고중교육을 보급했다. 2001년 우리 나라 초중졸업생의 진학률은 겨우 52%밖에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절반이나 되는 초중졸업생이 직접 사회에 진출하여 취업경쟁에 참여하거나 집에서 취업을 대기하고 있는 형편이라는 말이다. 한해 또 한해 저자질 인구의 루적은 발전이 빠른 중국경제에 가면 갈수록 더 무거운 올가미를 씌우게 된다.

이와같은 차별의 근본원인은 우리 나라 일부 지역에서 사회발전중에 조급성을 앞세워 한 입에 배를 불리려 하고 눈앞의 실리에 치중점을 두었기때문이다. 공정건설의 투자효률은 아주 빨리 회수하게 된다. 그러나 교육에 투자하면 몇년이 지나서야 그 효과를 볼수 있기때문에 교육을 중시하지 않은것이다.

둘째, 한국정부는 사회발전중에서 명확한 기획이 있었고 강유력한 수단이 있었으며 사회에 출현한 문제, 이를테면 빈부격차, 농촌문제 등을 제때에 신속한 조치를 취하여 발전중에 나타난 편차를 시정했다. 이와 비교할때 우리 나라는 발전중에 봉착하게 된 일부 엄중한 문제는 침착하게 처리하였으나 수단은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온화했으며 온건했다. 그 결과 때로는 일부 문제를 루적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지금 어떤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렀다. 례하면 삼농문제, 부패척결문제와 금융개혁문제 등이 난항에 빠지게 되였다.

농촌문제를 례로 들어 보기로 하자. 2002년 중국 도시와 농촌의 수입차이는 3:1을 초과하여 3.1:1에 도달했다. 이것은 다수 국가의 1.5:1이란 수자를 훨씬 초과했다. 농촌기초시설이 아주 락후하고 농민들은 교육, 의료와 기타 공공물품 점유에서 엄중하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엄중한 상황은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루적된 결과이다. 우리 나라 정부는 현재 3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는데 앞으로 효과적인 해결대책을 모색하게 될것이다.

한국도 농촌문제에 봉착하게 되였다. 박정희가 집권한후 공업발전은 농업발전보다 보폭이 아주 크고 빨랐다. 1962년 한국농민 평균수입은 도시주민들 수입의 71%에 달했다. 그런데 1970년에는 도시주민들 수입의 61%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 농촌도 농촌 기초시설이 락후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였다. 그리고 농민들의 거주조건도 아주 렬악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농촌상황과 대비한다면 한국 당시의 농촌문제는 작은 무당이 큰 무당을 만나는것이나 다름이 없다.

‘적은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균형을 잃으면 문제가 된다’라는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한국사회는 사회의 불공정한 현상에 대하여 아주 민감하다. 박정희는 한국특색의 ‘새마을 운동’이란 방식을 취하여 농촌문제를 전력 해결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마을 운동’이란 정부가 공업에서 번 돈을 농촌에 투입하고 일부 도시주민들의 수입을 깎아 농민들에게 분배해주는 방식이다. 1972년으로부터 1978년 정부지출중 농업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4%에서 38%로 천방지축 뛰여올랐다.

국가투자는 농촌발전을 유력하게 지지하여 주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도시주민 평균 수입은 14.6%가 증가되였다. 그런데 농호는 3.5%밖에 증가되지 않았다. 그후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이런 상황이 뒤바뀌였다. 도시주민들의 년 평균수입은 4.6%가 증가된 반면 농호는 9.5%가 증가되였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차별은 크게 축소되였다.

한국은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구조를 조절하며 금융위기를 대응하는 방면에서 한국인들의 과단성과 강인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강대한 유교전통으로 인해 한국은 사회발전 과정에서 사회륜리가치를 아주 강조했다. 사회기풍의 순결성, 애국주의, 인간의 정신면모를 아주 강조한것이다 우리 나라는 사회발전 과정에서 일정한 정도로 도덕표준을 잃은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사회는 대량의 옛전통을 보류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아직도 옛 법에 따라 공자제례를 지내는 국가이다. 장유(長幼) 존비(尊卑)질서가 한국사회에서는 아주 선명하게 표현된다. ‘인의충효’와 같은 전통도덕신앙은 여전히 한국인들이 지키는 도덕 신앙이다. 한국의 사회기풍과 사회성원들의 도덕수준은 중국보다 퍽 높다.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한국인들의 가장 돌출한 민족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례가 있으니 그것은 동남아 금융위기때 한국인들의 금품 바치기 운동이다. 한 민간단체에서 집안 롱속에 건사한 황금을 국가에 팔것을 한국인들에게 호소했다. 한화가 일조에 대거 추락한 상황에서 황금을 판매한다는것은 모험을 감내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있다. 뿐만아니라 국가에서는 한달후에 황금가격을 물어준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정말 군중운동때처럼 한 사람이 구호를 부르자 만인이 호응했다. 한국은행은 매일 황금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황금판매 대렬에는 금방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는가 하면 실업로동자도 있고 정부공무원이 있는가 하면 절당의 승려들도 있었다. 년령이 7순이 넘은 한 로인이 주택은행에 와서 조끼에 단 금단추를 떼여 영업원에게 주면서 자기는 다른 황금이 없으니 이것으로 자기 맘을 표시하니 나라에서 받아쓰라고 말했다. 집안 어른이 두살 되는 어린애를 업고 와서 어린애 목에 걸었던 금목걸이를 국가에 바쳤다. 이것은 집안 어른들이 어린애의 생일날에 생일기념으로 사준것이었다.

냉대를 받는 한국경험(2)

현재 중국에는 도덕의식이 일정한 정도로 상실되는 현상이 출현되였다. 계획경제시대 일부 슬로건은 이미 때가 지난 화석으로 되였다. 공자와 맹자의 도인 ‘온순하고 량심적이며 공경하고 검소하며 양보한다’는 학설도 백여년 정치운동의 충격하에 이제는 쪼각만 남아있을 뿐이다. 경제가 증강되는 동시 일정한 정도의 ‘물질주의’와 ‘배금주의’가 생성했다.

번화거리에서 돌연 급병이 도진 사람이 길가에 넘어져 신음하고 있다. 헤아릴수 없는 행인들이 그 곁을 지나치면서도 그를 눈여겨 보지도 않거니와 그를 구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공중장소에서 소매치기가 남들이 다 보는 그 앞에서 행인의 호주머니에 검은 손을 넣는다. 염세의 수렁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사람이 고층건물 지붕우에 서있다. 그런데 이것을 보기 좋은 구경거리로 생각한 사람들이 아래서 올려다보며 소리친다. “빨리 뛰여내려! 뛰여내리라니깐!' 한 망나니가 술의 힘을 빌어 길가에서 공공연하게 아가씨를 희롱하고 지어는 강간을 하지만 그 곳을 지나치는 행인들은 본척만척 한다. 이처럼 소름이 끼치는 뉴스가 신문에 실려도 그 누구 하나 놀라지 않는다. 이런 일을 너무도 많이 들었기때문에 이제는 심드렁해진것이다. 가정성원사이 상호 관심이나 배려가 결핍하고 가정에 대한 충성도 결핍하다. 이와같은 국가가 그래 정말로 흥성할수 있겠는가?

필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른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한국경험을 소개하여 한국의 장점으로 중국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것이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아홉 손가락과 중국의 한 손가락을 비교하는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중국의 다른 아홉 개 손가락에 대한 전시와 긍정이 없다. 또한 이와같은 비교는 전면성을 상실하게 되는것은 피면할수 없으며 또한 어느 정도 편격적일수 있는것도 피면할수 없다. 그러나 필자의 목적은 독자들의 주의를 인발시키는데 있다. 이 점에 한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리해하고 량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작자의 학술기초와 연구범위 및 집필시간이 제한을 받아 이 책은 과도성, 단계성을 띤 문장으로 되는것은 필연적이다. 이 책은 학술연구 저서가 아니다. 이 책에 담은 내용중 적지 않은것은 직매 직판하는것이 많으며 또한 필자가 타인의 연구성과 같은것을 가져온것도 있다. 가령 독자님이 한국사회발전경험의 높은 견해를 읽으려고 한다면 심도가 있는 학술저작을 읽을시라고 권한다. 나의 이 책자는 당신의 흥취를 불러일으키면 된다. 이 책을 읽고 한국에 대하여 흥취를 가졌다면 이 책을 시궁창에 던져버려도 좋다. 그 때는 이미 필자의 목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없는가 1

일본을 류학한 중국인이 ‘내가 아는 왜놈 군인’을 썼다. 그 책이 후에 베스트 셀러가 되였다. 이에 따라 책방에는 이른바 ‘왜놈 군인’을 쓴 책들이 우후 죽순인양 많아졌다. 그 책을 훑어보니 다 길가 포장마차에서 판매하는 거치른 묘사로 넘치는 책자였다. 감각관능 자극을 추구하는 제목과 세부묘사는 그 책을 쓴 사람과 그 책을 읽는 사람의 해빛아래 내 놓지 못할 그 어떤 욕념이 흘러넘친다.

우리가 밟아 뭉게지 못하는것이 없다. 우리 성격에는 어딘가 장엄한 그 무엇이 결핍하다.

그러나 그 누구 하나 이를 두고 큰 목소리로 웨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실용주의자로 되였다. 이 민족은 수천년 풍랑을 헤쳐 오면서 그 어떤 일도 다 겪어보았다. 이제는 더 호기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 어떤것도 다 용인할수 있다. 또한 그 어떤것도 다 접수할수 있다. 그래, 몇백년전 누군가 자신의 민족영웅 원숭환(袁崇煥)의 몸에서 베여낸 살을 쟁탈하지 않았던가?! 그 살을 먹으면 병을 뗀다는 말을 믿은 민족이다. 형언할수 없는 정복과 통치를 감내하면서라도 입에 풀칠을 한다면 좋다는것이 아닌가? 하다면 조상의 아픔과 고통과 치욕으로 돈을 바꾸는것을 두고 대경실색할것까지는 없다는것이 아닌가?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없는가 2

한번은 귀향하여 어르신들과 함께 구들에 앉아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자전거로 화제가 넘어갔다. 삼촌뻘 되는 분이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자전거를 산 집은 필자의 먼 친척으로 되는 둘째 할아버지가 읍에서 사왔다고 말했다. 둘째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온 날 이 마을은 마치 잔치라도 벌린듯 사람들이 모여 자전거를 신기한듯 만져보고 뜯어보았다고 말했다.

필자가 물었다. “둘째 할아버니는 뭘 하시는 분입니까?”

통역관이란다.

“통역관이라니요? 누구한테 통역해 주는겁니까?”

“일본사람이지 누구겠나. 그때 일본사람을 내놓고 또 누가 있나?”

필자는 깜짝 놀랐다. “그럼 한간이 아닙니까?”

삼촌뻘 되는 분은 입을 후물거리며 별로 놀라지 않았다. “지금 말로는 한간이라고 하지, 그 때는 아주 멋진 분이였다.”

나의 맘이 아파났다. 구들에 앉은 얼굴이 검실한 이 농사군의 모습이 한 순간에 필자의 눈앞에서 변형되였다.

1945년 전, 즉 로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사변’이전에는 필자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만주국’이라 불렀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필자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큰아버지 들은 다 일본인들의 ‘순민’들이였다. 바로 필자 옆의 이 창문에 낡을대로 낡아서 거무틱틱한 위만주국의 주페를 달아메여 순민표식으로 삼았던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이야기는 일본인들에 관한 화제감으로 번져졌다. 로인들은 일본인들이 어떤 모양이고 누구누구는 무슨 무슨 일로 현에 잡혀 올라갔댔으며 고추물을 먹고 선혈이 머리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본인들이 농민들을 강박하여 아편을 심게 했다. 일본인들이 투항하여 철거할때 온 마을 사람들은 동구까지 몰려가 자동차를 처음 구경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외지에서 출근하면서 고향을 여러번 다녀갔다. 귀향할 때마다 민간구비 전설을 이야기 들었고 ‘한담’같은것을 너무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 마을에서 발생되였던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자전거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을 다 망각했을것이다.

무엇때문인가?

아마도 고향사람들은 보통 평민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기때문에 일본인이 철거했고 다시는 볼수 없게 되였고 또 돌아오지도 못하게 되여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망각한것이 아닐가? 백성들의 생존은 생존을 위한 생존에 불과한것이 아닐가? 살아있다는 이것 하나면 되는것이지 다른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몇천년 내려오면서 우리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질박하고 건망증이 많은 나의 부형들이여!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해한 사람들을 그처럼 대범하게 대해 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것이기때문에 지나쳐버리면 그만이라는것이다. 그들은 발등의 불만 끄면 된다. 지금 일본인들이 또 돌아왔다. 그들은 양복에 구두를 신고 여유있고 례절있게 사람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이보다 더욱 관건적인것은 그들의 가방에는 돈이 들어있다. 어떤 일본사람은 전쟁죄행도 승인하려 하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괴상한 말을 하면서 사단을 일으킨다.

지혜는 여러가지가 있다. 최고급 지혜는 노자가 발명한것이다. 이를 두고 물처럼 선한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물은 선하기 때문에 만물에 유리롭지만 그 득을 보려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악을 두고 도를 론할 때 …… 군자는 아무런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때문에 근심이 없다’물은 원래부터 그 무엇을 견지하지 않는다. 물은 그 어떤 환경에도 적응한다. 눌리워서 그 어떤 형태로 되는것도 다 접수한다. 때문에 물은 오물도 받아들일수 있고 또한 그 어떤 모가 난것도 다 갉아 모를 죽일수 있다. 때문에 물의 생명력은 가장 완강한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총명한 민족의 하나라고 한다. 중국인의 성격이 물과 같기 때문이란다.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없는가 3

우리 주변에 일본인들의 죄를 꼼꼼히 기억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일본을 용서할수는 있지만 잊을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국 국회에서는 몇년전에 한 결의를 책정했다. 이 결의에 의하면 조선침략전쟁에 참가한 일본인들의 한국 입국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그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례외가 아니다.) 이것은 일본이 전쟁죄를 반성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무시로 엉뚱한 말을 한 것에 대한 반응적조치인것이다.

재작년 4월 일본은 또 한차례 교과서문제로 중국과 한국 등 나라를 격노시켰다. 한국에서는 일본주재 한국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리고 분노한 한국인들이 일본국기를 소각했다. 많은 도시에서는 성세호대한 반일시위행진을 단행했다. 40여개 사회단체는 또한 일본문화와 일본제품을 보이코트할것을 호소했다.

지금도 보통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당시 저지른 만행을 두고 이를 간다. 일제 강점시기 받은 치욕의 고통스런 기억은 한국사회의 각 방면, 각 곳에 침투되여 있고 모든 한국인들의 작은 세포에 다 침투되여 있다. 치욕감은 몇십년이래 한국인들을 불태워 올렸다. 현대 한국인들이 한국의 현대화건설에 성공한 배면에는 아래와 같은 집체 잠재의식이 깔려 있다. 즉 한국인은 절대 렬등민족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한것이다. 간단한 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동아시아 축구에서 한국팀과 일본팀이 대결할때마다 한국팀은 필승의 신념을 북돋운다. 그것은 한국팀이 세계 그 어느 팀에 져도 다 부담스럽지 않게 접수할수 있지만 일본팀에 진다는것은 전체 국민이 응낙하지 않는다. 과거 한국인들은 전쟁터에서 일본을 당해내지 못했다. 현재 한국인들은 축구장을 전쟁터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한국인들은 그 어떤 기회라도 충분히 리용하여 자기네는 절대 겁쟁이가 아니라는것을 일본인들에게 증명하려고 한다.

지난번 동아시아 톱 10시합 일한 접전전 한국 국내 인터넷 ‘천리안’중의 ‘글 올리기’페이지에 한국 축구펜들이 분분히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한국팀은 꼭 이겨야 한다. 그렇지 못할때면 조상에 미안하다. 가증한 일본인이 나의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갔다."

‘일본은 지금도 조선을 침략한것을 정식으로 사죄하지 않았다. 우리는 푸른 잔디밭에서 일본인들을 혼빵 내 주어야 한다.’

정말로 사람마다 개성이 굴강한 민족이다. 그들의 국기는 노자의 8괴도 태극을 그렸지만 그들의 성격은 절대 물과 같지 않다. 그들의 성격은 암석과 같아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중국 동북의 허다한 도시에는 일본식건물이 하늘을 떠이고 우뚝 솟아있다. 이것은 1945년 일본인들이 남긴 유물이다. 건축 시공이 정밀하여 지금까지도 아무런 손상이 없이 잘 보관되여있다. 일본건물은 아직도 중국에서 건물자체의 역할을 발휘하면서 중국 거리에 이국의 풍채를 자랑하고 있다. 어떤 지역은 일본 풍채가 한가닥 풍경선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러나 한국, 30년간이나 일본식민지로 있은 한국에서는 지붕이 뾰족한 일본식건물을 보기 쉽지 않다. 일본식건물이 없었던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일본식건물을 거의 다 허물었기 때문에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된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 몸에 있는 흉터를 없엔것이나 다름이 없다. 선택성 있게 몇곳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은 국치기념관으로 쓰기 위한것이다.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뭐가 모자라는가(4)

한국은 원래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작은 동생에 불과했다. 몇천년간 한국은 묵묵하게 아시아 대륙 동북 한구석에 붙어서 소문없이 자랑없이 자신의 력사를 적어왔다. 때문에 쉽게 사람들로부터 망각하게 되는 그런 처지였다.

하긴 건성으로 보면 이 작은 국가에 남다른것이 정말 별로 없기도 하다. 평범하고 또 돋보이는것이 없다. 한문(漢文)화의 거대한 영향력에 따라 이 작은 국가는 중국과 거의 같을 정도로 감염되였다. 때문에 이 소국의 독특한 점이 중국문화에 깔리여 있다. 청나라가 결속되기 전 중국 관원들이 조선을 방문하면 번역을 따로 쓸 필요가 없었다. 한자는 조선 관청의 언어로 되였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이미 한자를 페지했지만 한국의 최대 신문인 "조선일보"와 저명한 대 기업집단인 현대집단 등 기업의 정식 명칭은 다 한자로 기재했다. 한국의 민족복장은 당나라 시기의 특징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국인들의 이름도 완전히 중국의 전통을 이어받은것이다. 세계 각국을 비교할때 중국인은 한국에서 문화적 차이가 가장 적은것을 감수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표면적인 상사성에 불과하다. 이 표면적인 상사성이 중한 민족간 성격상 거대한 차이점을 가려주고 있다.

기나긴 과거에는 산과 물이 가로놓여 있고 교통이 불편했다. 이것은 중한민족간의 차이점을 구별하는데 장애로 되였다. 중국의 전적중에 조선에 대한 기록도 많지 못하다. 력대 헤아릴수 없이 조선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이 소국의 빈약함에만 주의를 돌렸다.

청나라 광서년간 섭사성이 조선을 방문하고 쓴 필기 ‘동유기정(東游紀程)’에 이런 문자서술이 있다.

‘조선의 가옥은 대부분 사합옥으로 되여 있는데 방에 들어가면 즉시 마루에 앉게 되여 있다. 남성들은 게으르고 녀성들은 고된 일을 담당했다.’

‘(茂山) 성내는 황량하고 루추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서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하는가 하는것을 알만하다. 조선사람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목적은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것이지 자산을 챙길 생각이 없다. 그 어떤 난제에 봉착하게 되면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본딸 생각만 하고 변통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책을 읽으면 페물이나 다름없게 된다. 평소에 유람같은것을 즐긴다. 그들의 문장은 문리가 통하지 않으며 몇십마디를 필담해도 그 뜻을 리해하기 어렵다. ………’

‘조선인들은 지리적 장점에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관민들의 성격이 게을러서 근면함이 부족한것이 우려된다. ’

청조 말기 천조 대국의 속국은 하나 또 하나 청나라를 리탈했다. 마지막에 남은 조선은 또한 일본이 호시탐탐 욕심을 내였다. 조선을 자기네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은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홍장이 아래의 가설을 제기했다. 즉 조선을 중국의 한 성으로 접수하여 중국이 조선을 완전히 보호하는 형식을 빌어 조선을 보존시켜준다는 가상이다. 그는 이런 방식을 취해야만 취약한 조선민족을 구해줄수 있다고 인식했다.

이와같은 설계가 현대화적인 외교상식이 결핍하다는것은 그만두고도 전략적 가능성이 없다는것은 너무도 번연한 사실이다. 이 설계를 통해 ‘천조’의 사람들이 이 민족에 대하여 료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잘 알수 있으며 그들의 성격에 대하여 심각한 인식이 얼마나 결핍한가를 알수 있다. 중화제국이 가장 강대했던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웅심이 발랄한 황제였던 수양제와 당태종이 거국적인 군사행동을 취했지만 결과는 다 이 작은 해동 소국에 의해 철저하게 패배되였다. 리홍장은 아마 이 점을 망각한듯 하다. 일본인도 이 점을 망각했다.

조선민족은 정복할수 없는 민족이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새롭게 한국을 인식하여 주어야 할 충분한 리유가 있다.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모자라는가(5)

내가 한국을 조금씩 알게 된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였다.

중국 축구가 "공한증(恐韓證)에 걸렸을 때부터였다.

세계 5분의 1이란 인구를 가진 대국의 국가팀이 몇십년간 아시아 2류팀에서 노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몇십년간 우리 나라에서는 이 스포츠 항목에 거대한 인력과 물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 항목에 진보가 있는것 같으면서도 없었다.

모든 스포츠 운동에서 축구는 한 국가의 민족성격을 가장 돌출하게 보여주는 항목이다. 브라질인의 화려함, 프랑인의 로맨틱함, 엥글란인의 억셈과 태국의 완강함이 축구장에서 잘 나타났다. 그런데 중국팀은 축구장에서 중국인의 어떤 성격을 보여 주었는가?

중국 축구 최고수준을 대표한 열한명 남자 대장부들이 기염이 하늘을 솟구치는 한국팀의 충격앞에 언제나 다리에 맥이 없고 속이 뭉클어지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어쩌다 골인 하나가 앞서면 따라 설가 근심되여 진공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수비할 생각만 한다. 축구게임 장면이 보기 좋든 보기 나쁘던 그런것은 념두에도 없다.

한번 졌다. 두번 졌다. 세번 졌다. 드디어 열두번이나 졌다.

무슨 원인인가? 컨디션이 못 따라가서인가? 기술이 약해서인가? 전술이 없어서인가?

처음에는 컨디션을 틀어쥐였다. 세계에서 둘도 없는 컨디션 측험을 실행했다. 한국인들은 아무리 뛴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물론 우리도 아무리 뛰여도 죽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효과가 없다.

기술에 한해서는 한국인들마저 중국팀의 기술은 자기네보다 못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전술적으로 볼때 안정하게 방어를 위주로 하다가, 반격을 가하는 전술을 쓰다가, 공방을 겸하는 전술을 취했다. 대형은 ‘3 5 2’에서 ‘4 4 2’로 고쳤다. 그후에 또 다시 ‘4 5 1’로 정했다. 그러나 역시 효과가 없다.

거의 모든 방법을 다 취해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값이 높은 코너를 초빙해 썼다. 중국팀은 어딘가 진보가 있어 보였다. 필경 중국팀은 월드컵 본선시합에 참가했던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과 비교할때 우리의 진보는 그만 빛을 잃고 만다. 비록 전력투구로 뽈을 찼고 또 배합도 괜찮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국부에서는 우세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시합은 정신이 팔릴때가 있고 실수할때가 있었다. 90분간의 정신력을 집중한다는것이 도달 불가의 목표로 되였다.

하다면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여유작작한 한국 로인 최은택의 해석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중국과 한국의 축구에 대하여 비교적 깊은 감수가 있는 이 한국 국가팀의 코치는 중국팀은 아무것도 모자라는것이 없다. 단지 '정신력'이 모자란다는것이다. 한국선수는 영예를 위해 공을 찬다, 직업선수는 축구를 자기의 생명으로 간주한다. 경기에서 전승하기 위해 자기 목숨도 바칠수 있다. 그런데 중국선수들은 이와 같은 필승의 신념과 끝까지 견지하는 결심이 결핍하다는것이다.

이 한국 로인은 이점에 대하여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중국선수들의 신체조건, 기술기초는 아시아에서도 1류라고 평가했다. 그는 중국선수들이 훈련시에 무엇 때문에 전력투구하지 않는지 알수 없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정식시합시 무엇때문에 필승의 신념이 부족한지 알수가 없다고 말했다. 중국선수도 직업 축구선수인데 말이다.

이 한국 로인은 중국 축구선수가 직업 축구선수인것은 틀리지 않은데 중국 축구선수들은 한차례 시합을 위해서는 전력투구하지 않는다는것을 모르고 있다. 중국인의 눈에 축구는 그저 축구에 불과한것이지 축구를 위해 목숨을 내걸지 않는다는것을 모르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너무도 한가지 일에 집착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기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주변의 사람들이 다 속이 편안하지 못하다. 중국축구팀이 시합에서 졌다. 그는 아주 속상해 한다. (그가 속상해 하는 원인중에 하나는 상금에 대한 애석함도 있다.) 그러나 하루 밤을 자고나면 속이 풀린다. 맘의 균형을 다시 찾은것이다. 축구라는것은 우연성이 많은것인데 그 누가 축구시합에서 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브라질팀도 져본 적이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속의 균형을 되살릴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잠을 자지 못한다. 수치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한밤을 세운다.

때문에 인구가 중국의 3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령토가 중국의 백분의 1밖에 되지않는 소국이 축구게임에서는 언제나 중국팀을 눌렀다.

축구만이 아니다. 별로 유별한 곳도 없는 소국이 올림픽과 동계올림픽 내지 각항 선수권시합에서 보여준 표현은 정말로 다시 볼 상황이다. 한국은 스포츠대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선수들의 그 견인불발의 정신과 완강한 박투 정신은 상대방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아시아의 모든 스포츠항목에서 국민신체소질이 별로 돌출하지 못한 소국이 언제나 중국과 감히 대항하고 있다.

여기에 이런 정신이 있다.

60년대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한국팀이 일본으로 날아가 시합에 참가하게 되였다. 떠날때 한국 대통령이 몸소 모든 선수들을 접견했다. 대통령이 간단한 연설을 하고 마지막으로 "가령 진다면 당신들은 대한해협(일본해협)을 건너오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이 말의 뜻인즉 진다면 바다에 몸을 던져 국민들에게 사죄하라는 뜻이다.

그 한국 대통령은 자기 수중에 장악한 권력을 등대고 이렇게 말한것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에 따르면 대통령은 모종 의미에서 이 국가, 이 민족의 어버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가장의 신분으로 자기 자식에게 이와같은 말을 한것이다.

우리는 절대 이렇게 못할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것은 정말로 과분한 말이며 정말로 세심하지 못한 말이며 정말로 온전하지 못한 말이며 정말로 숙련되지 못한 말이다. 하필이면 이렇게 말할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지혜롭지 못한 표현이며 고명하지 못한 표현이다. 당당한 국가 최고 령도자가 축구라는 게임을 위해 이처럼 문제를 크게 벌릴 필요가 있는가? 물론 당시 일한 량국 추구팀을 볼때 한국팀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축구는 둥근것인데 한국이 정말 진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사실상 한국 대통령이 이 말을 할때 그는 한국팀이 진다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에게 진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민족은 바로 이처럼 옥이 되여 부서지는 그런 굴강한 성격을 구유하고 있다. 이 민족은 이처럼 영예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성격이다. 때문에 목적에 도달하지 않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으며 기어코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다.


  • ?
    nuroc73 2004.12.16 14:33
    누구에 의해 쓰여진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을 중국과 동일시하려하고 은근히 민족성을 깎아내리는 것이 순수한 고구려인의 후예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역사왜곡은 일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금 중국정부가 어떠한 의도로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의식있는 한국인들은 모두 잘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침묵하고 있는 다수를 더이상 건드리지 말도록하자. 한국은 일본이 아니며 물론 중국과도 관계없다. 개인적으로 조선족 동포들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잘 모르는 조국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영향을 끼치려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전쟁직후 한국의 동포들이 피땀을 흘리며 나라를 세울때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나? 그 밖의 다른 해외거주 동포들도 다를 바가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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