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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기획
2019.12.05 11:05

빛바랜 사진 속, 비련의 여인 나혜석

1102-나혜석5.jpg

▲샬레의 집 계단에서...   

윗 줄 왼쪽부터 쟈클린 Jacqueline(큰딸), 잔느 Jeanne(샬레부인), 나혜석, 엘렌 Hélène(둘째딸), 샬레

아랫 줄 왼쪽부터 김우영, 인도인, 서영해, 안고 있는 아이는 샬레와 잔느 사이에 난 아들 장 Jean



“이 집은 파리 상라자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 간 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하고 하는 곳에 있다. 시외니 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 있고 우거진 수풀, 엉켜 오르는 덩굴, 작약화, 월계화, 등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는 채소밭이 있어 딸기, 감자, 상추, 파, 콩이 심겨 있다. 또 한편 마당에는 토끼, 비둘기, 밀봉(꿀벌)을 기른다. 그리하여 꽃 꺾어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뜯어 반찬하고 가축 잡아 공물로 쓴다. 외형 차림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 글은 나혜석이 1936년 4월 ‘삼천리’ 잡지에 쓴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나혜석은 1927년 7월 19일에 남편과 같이 파리에 도착해 1928년 9월 17일까지 파리에 머문다. 변호사였다가 당시 일본 정부의 총독부 관리였던 남편 김우영은 중국의 외지에서 5년간 근무했다는 이유로 일본정부로부터 해외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이미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 셋을 둔 32세의 젊은 엄마였던 나혜석은 자식들을 나이 드신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용감하게 남편을 따라 나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평생 세계 여행이 꿈이었던 나혜석은 한 술 더 떠서 이 기회를 이용해 자비를 보태서라도 이 여행을 연장해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싶어했다. 결국 당시 2만원이라는 전 재산을 털어 나혜석 부부는 1년 2개월 동안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돌아보게 된다.
나혜석 부부가 중국에서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소련을 거쳐 파리 북역에 도착한 날은 1927년 7월 19일. 기차역에는 이종우, 안재학, 최근우 등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혜석 부부는 이들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우선 소르본느 근처의 작은 호텔에 여정을 풀고 파리 생활을 시작한다. 파리는 이들에게 일종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했다.

“파리라면 누구든지 화려한 곳으로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 처음 도착할 때는 누구든지 예상이 빗나간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일기가 어두침침한 것과 여자의 의복이 흑색을 많이 사용한 것을 볼 때 첫인상은 화려한 파리라기보다 음침한 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은 오래오래 두고 보아야 파리의 화려한 것을 조금치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나혜석 평전 / 정규웅 저. p180)

여독을 풀고 일주일이 지난 7월 27일 나혜석 부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영-미-일간의 군축회의에 참관하러 떠나고 그 주위의 안시(Annecy), 융프라우, 베른느 등을 구경한 후 8월 14일 파리에 돌아온다. 
8월 24일 다시 브뤼셀로 떠나 다음날 브뤼셀 구경을 하고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가서 이준 열사의 묘를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해 9월, 남편 김우영이 베를린으로 법률 공부를 하러 떠날 때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다. 파리에 혼자 남기를 선택한 그녀는 아카데미 랑송(Académie Ranson)과 비시에르 화실(Atelier Bissière)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파리 화단에서는 중장년층의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이 군림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틈 나는대로 당시 10여명이었던 파리의 조선 유학생들과 어울렸는데, 10월 어느 날, 파리 유학생들이 새로 도착한 최린을 위해 이종우의 집에서 환영식을 개최했다. 거기서 나혜석과 최린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3.1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이후, 변절 후 일본의 경비 지원으로 유럽을 시찰하기 위해 파리에 들르게 된다. 최린은 김우영과 잘 아는 사이였고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김우영이 최린에게 나혜석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는 설도 있다. 

그 해 11월 11일, 나혜석과 최린은 파리 근교 르베지네(Le Vésinet)에 살고 있는 샬레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펠리시엥 샬레(Félicien Challaye)는 1919년 4월에 한국을 방문해 3.1운동의 여파와 흔적을 현장에서 직접 보았던 드문 서양인 중의 하나로 당시 약소국민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최린이 12월 9일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약소민족대회에 참가하여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샬레가 주관해 준 덕이다. 
나혜석이 샬레 부부에게 프랑스 가정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자, 샬레 부부는 자기네 집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을 했고, 나혜석은 이 후 이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이 집 가족은 50여세 된 샬레씨, 40여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나혜석‘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 1934. 3 <중앙> 발표)

이 후 나혜석과 최린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최린의 통역을 맡았던 공진항과 함께 셋이서 물랭루즈와 활동사진관 ‘고몽 팔레’를 구경가고, 루브르 박물관 좌우에 우거진 삼림 사이를 거쳐 클뤼니 박물관까지 걷는다. 일요일에는 밀리는 군중 사이에 끼어 루브르 미술관을 찾아가고 봉 마르쉐 백화점을 구경가는가 하면 휴일에는 페르 라세즈를 거닐며 산책을 즐겼다. 
이들의 밀회 아닌 밀회가 하도 유명해서 당시 유학생들에게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 댁’으로 통했다고 한다. 

나혜석과 최린의 관계는 최린이 12월 16일경에 이태리로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나혜석도 며칠 후인 12월 20일, 연말을 남편과 같이 보내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내 생활이 걸작이 되고 싶다”는 나혜석은 이 관계로 인해 3년 후인 1930년에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4년 후인 1934년 8월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한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삼천리 1934. 8~9)

이혼을 당한 후 심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 나혜석은 최린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최린은 파리에서의 최린이 아니었다.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는 최린에게 나혜석은 1934년 9월 20일자 조선일보에 공식적인 소송문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정조를 유린한 이유로 이혼을 당했으니 위자료 12,000원을 청구한다는 내용을 게재해 초대형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로써 나혜석은 페미니스트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당시 조선사회는 오히려 나혜석을 매도함으로써 그녀를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만든다.


1102-나혜석1.jpg



샬레 가족과 같이 찍은 나혜석 사진 발견

올 봄에 기자는 한국에서 온 한겨레 신문 기자를 동반하여 샬레의 외손녀 되는 분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남부 발랑스(Valence)에 사시는 안느 마쥐레는(Anne Mazuray 81세)는 샬레의 둘째 딸인 엘렌의 딸로 어렸을 때 샬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사실 샬레의 부인 잔느는 샬레와는 두번째 결혼으로 전남편 사이에서 얻은 딸이 엘렌(Hélène)이므로 안느에게는 샬레가 친할아버지는 아니다. 할아버지가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 얘기 등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안느가 엄마에게 물려 받은 사진첩을 들고 나왔다. 혹시라도 나혜석 사진이 들어있을까 해서 1927~28년도 사진첩을 뒤지고 있는데, 아! 나혜석 사진이 4장이나 들어있는게 아닌가. 

1928년 4월 2일로 표시된 사진은 샬레 집 앞 계단에서 샬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나혜석과 김우영이 보이고 또 의외로 서영해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첩에는 나혜석 부부를 Mr et Mme Kim (Coréens)으로 적어놓았고 인도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서영해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듯 했다. 단발 머리 모습의 나혜석은 개량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10.5x6과 8x5.5의 작은 사이즈의 흑백사진은 너무 오래 되어 선명도가 많이 떨어졌으나 거의 유학생처럼 살았던 당시 파리에서의 나혜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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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문득 80이 넘은 샬레 손녀 분이 갖고 있는 나혜석 사진이 생각났다. 이 손녀가 사망하고 나면 아들이 하나 있긴 해도 이 귀한 사진이 이러 저리 흩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사진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손녀분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혹시 나혜석 사진을 기증하시던가 판매하실 의향이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타진하니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이 사진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자기도 좋다며 흔쾌하게 기증하시겠다고 한다. 
결국 기자는 지난 11월 초에 파리에서 이 사진을 받았다. 사진은 나혜석 기념사업회에 기증할 예정이고, 내년 4월 28일 나혜석 출생일에 맞추어 해마다 진행되는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에 손녀분이 초대되도록 중간 역할을 할 예정이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 한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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